운명

초단편소설4

by bony

수업 종이 울리자마자, 반장인 재인이의 주위로 참새들이 방앗간에 모이듯 반친구들이 몰렸다.

경쾌한 소음 속에서 한 목소리가 뚫고 나왔다.

"재인아! 오늘 영어쪽지 시험 볼 것 같아?"

"시험은 내일 볼 거야. 걱정하지 마."

"앗싸! 시험 안 본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추냐? 매번 네가 말할 때마다 틀린 적이 없어. 암튼 고마워, 재인아!"

"아이 뭘,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아직 진도가 다 안 나갔잖아. 인숙선생님은 원래 진도를 다 나간 다음에 시험을 봐. 패턴을 읽으면 돼."

재인이는 친구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친구들은 그제야 오랫동안 묵혔던 변비에서 탈출한 사람들처럼 안색이 환해졌다.


수업이 끝난 후, 재인이는 가방에 교과서를 꾸역꾸역 모두 넣었다.

"야. 진재인! 사물함 놔두고 굳이 그렇게 무겁게 시리... 쯧쯧. 너 왜 그러냐?"

"어이구. 공부 못하는 네가 뭘 알겠냐?"

"잘난 척은! 칫! 이따가 우리 마라탕 먹으러 갈 건데, 갈래?"

"이 몸은 먼저 갈게! 맛있게 먹어! 빠이~~~"

"야! 그냥 가는 거야? 그나저나 너는 너희 집에 언제 초대할 거야!"

"..."


재인이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총총걸음으로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때 어딘가에서 나타난 어둠의 그림자가 재인이를 감쌌다. 마치 벗어놓은 도포를 다시 입는 듯했다. 재인이에게서는 파르르 한 어떤 작은 떨림도 보이지 않았다. 재인이는 서슬 퍼런 칼날 같은 눈빛을 하고, 명령 내리는 듯한 손가락질을 허공에 해대며 구름 위를 걷는 듯 걸어갔다. 학생들 옆을 지나가자 그들의 무리가 증발하듯 흩어져버렸다.


재인이는 물 위에 떠 있는 기름 한 방울이였다.


재인이가 하교를 한 후, 교실 안에 남아있는 친구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너 재인이네 집에 가 본 적 있어?"

"아니, 걔 좀 이상하지 않아?"

"걔가 지날 때마다 이상한 냄새가 나."

"맞아. 나만 느낀 게 아니었네. 무슨 샴푸를 쓰는지 걔가 지나간 자리마다 진한 향이 남아. 우웩!"

"내일 네가 재인이한테 물어봐!"

"싫어. 내가 왜?"

"너 아까 전에 시험은 아주 잘 물어보더니 뭐야? 빼는 거야? 네가 재인이랑 가장 친하지 않아?"

"아니. 내가 왜 그런 애랑 친하냐? 공부 좀 한다고 잘난 척하는 그 계집애 뭐가 좋다고! 아까 말하는 것 봤지? 나 무시하는 거. 아휴. 나랑 걔랑 제발 좀 엮지 마라!"


재인이는 버스에서 내려, 대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점점 들어갔다. 다다른 곳은 햇빛이 들지 않는 작은 언덕 위에 골목길이었다. 그곳은 조그만 인형집 같은 판잣집들이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붙어있었다. 골목길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회색이 되어갔다. 시멘트를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발라 놓은 바닥과 벽면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밝은 색이라고는 도통 찾아볼 수 없다. 집들은 꽁꽁 보자기에 싸 있듯이 있다. 보물을 숨겨두는 것과는 반대의 이유에서.


골목에서 3번째의 집 앞,

한 한복을 입은 여자가 퍼뜩 거리는 생닭을 들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닭은 이내 우악스러운 여자의 손에 들고 있던 날카로운 물건에 의해 영원히 조용해졌다.

그리고 선명한 붉은 액체가 회색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악, 저게 뭐야!"

우연히 지나가던 여고생이 이 광경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질주하듯 골목길을 뛰어내려 갔다.

그들의 눈은 커질 대로 커져있었다. 메고 있던 가방이 자리를 못 찾고 들썩들썩거렸다.

그리고 재인이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들의 시공간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왔니? 우리 반장딸.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네. 엄마가 오늘 액맥이굿 하는 날이야. 냉장고에 너 좋아하는 간식 해 놓았으니까 알아서 먹어라."

방 안은 사람을 어지럽게 할 정도의 향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온갖 과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방울과 부채, 오방기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채도가 높은 빨강, 초록, 노란색으로 칠한 그림들이 미소를 짓기도 하고, 인상을 쓰고 있기도 하고, 무표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재인이의 눈에 방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리가 없었다.

재인이는 냉장고에서 간식을 챙겨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에는 어떤 책도 문제집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곧 책상 위에 가방에서 나온 네모난 귀한 종이손님들이 놓였다. 재인이는 당장 샌드위치를 입에 배어 물으며 교과서를 펼쳤다. 곧 코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주르륵 흘렀다. 대충 휴지로 틀어막고 다시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그때, 재인이의 귀에서는 방울소리가 울렸다.

재인이는 귀를 틀어막고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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