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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노동자 회고록 2

다시 시간을 거슬러 가서,

by 해일

제2외국어를 선택할 당시 한자를 제외하고 남은 것들 중 가장 귀엽게 생긴 것은 키릴 문자였다.


Д - 짝다리 짚고 선 애

Э - 가로획들을 억지로 까뒤집어둔 탓에 바들대며 괴로워하는 ‘E’

Ё - 주둥이 짧은 오리

Ж - 몸통, 침, 다리 길쭉길쭉 거대한 산모기

Ф - 캐러멜 시럽 씌운 사과 또는 아이스바의 아슬아슬한 마지막 한 입

З - 꽤 불만스럽게 튀어나온 입술

Ш— 포세이돈이 너무 세게 휘두른 나머지, 자루만 남기고 날아가 지나가던 배의 갑판 위로 쿵 떨어진 삼지창 대가리

Ч - 사막의 키 큰 선인장

Ц - 줄줄 새고 있는 콩쥐의 물독

.

두뇌를 무진장 자극하는 자태였다.

스페인어, 아랍어, 프랑스어 사이에서 선택하느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러시아어로 가, 갸, 거, 겨를 시작했다.


이 선택이 어떤 길로 나를 데려갈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고시 합격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은 어느 날, 러시아로 일단 떠나보겠다고 마음먹게 될 줄도.




1차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보고 러시아어 면접까지 봤다.

머리카락이 붉고 굽슬굽슬한 원어민과 한국인 면접관들이 앉아있었다.

지금 보면 러시아어 질문들에는 매우 간단한 수준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스크바에는 어떤 명소들이 있나요?”

“어…Теремок*이요.”

* Теремок: 온갖 종류의 소가 들어간 블린니(크레페와 유사함)와 수프, 음료 종류를 취급하는 식당


어디선가 본 명칭을 주워 올리자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면접장 분위기가 풀어졌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머릿속에서는 이게 정말 내가 가야 할 길인지 묻는 질문이 시끄럽게 벽에 부딪히며 튕겨 다녔다.


지긋지긋한 벽돌에 지나지 않던 온갖 수험서들을 뒤로 치웠을 때,

즉각적인 복학은 스스로에게 너무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곳이 필요했다.


한 학기로 기간을 잡고 러시아어 어학연수를 준비했다.

사실 그 과정을 나타내는 데 ‘준비’라는 단어는 너무 고상하긴 하다.

삐뚤빼뚤 위태위태한 꼴이 딱 초등학생 때 그리던 마인드맵이었다.


의사결정 마인드맵.jpg 당시 의사결정 과정 수준


당시 러시아는 입국 시 비자가 반드시 필요했던 곳이었고,

알찬 반공 교육과 ‘마더 러시아’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들 덕분에 주변의 우려가 따라다녔다.


“그 소련까지 도대체 뭐 하러 가노. 하던 공부나 마무리하지.”

“야, 거기 스킨헤드들은 너 같은 애한테는 총알도 아까워서 안 써.”

“살아서 돌아와라.”


숱한 걱정들을 단번에 종식시킬만한 러시아어 회화 능력은 물론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험을 위한 언어 공부내용이 오롯이 ‘언어’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녹색 성장(зелёное развитие)’을 ‘악한 성장(злое развитие)’으로 잘못 말하든 어쩌든*,

본인 상태 설명도 잘 못하는 처지에 저런 단어들을 실제 대화에서 언급할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때 러시아어 선생님한테 혼날 줄 알았다. 그러나 당시 정부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던 선생님은 ‘악한 성장‘이 틀린 말은 아니라면서 입으로 불을 뿜으며 분노했다.


모스크바 공항 픽업 이후 향하는 곳은 어디인지,

이후에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유학원에 물어보기라도 했어야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살뜰히 챙기는 정신을 갖고 살던 인간이 확실히 아니었다.


그렇게 얼레벌레 10월 3일, 하늘이 열린 날에 아에로플로트* 항공기는 한국 땅에서 발을 떼고 점프했다.

*지금은 사라진 직항편. 기내식에 오예스도 줬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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