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 반복, 그리고 개체성의 붕괴,황인찬 <우주 세기의 돌돌이>중심으로
이름을 세는 일과 개체를 세는 일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자명한 사실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알면서도 이름에 기댄다. 정확히는, 알기 때문에 더욱 기댄다. 이름이 길면 오래 산다는 말이 미신임을 인지하면서도 물레를 돌리는 것, 그 행위의 구조 안에 이미 언어와 존재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예비되어 있다. 황인찬의 「우주 세기의 돌돌이」는 바로 그 간극 위에, 정확히 그 위에만, 세워진 시다. 시는 친근하다. 낡은 침대, 잠든 연인, 강아지. 그러나 이 친근함은 일종의 위장이다. 표면의 귀여움 아래에서 이 시는 이름과 존재의 관계, 복제와 동일성의 문제, 사랑하는 것을 붙잡아두는 행위의 근본적 불가능성을 조용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해체한다.
황인찬의 <우주 세기의 돌돌이>가 그 예시이다. 이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시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으나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억압해왔던 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이름을 부른다. 반려동물의 이름, 연인의 이름, 이미 곁에 없는 사람의 이름. 그 부름이 언제나 대상에 온전히 닿는다고 믿으며. 그러나 그 믿음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어느 밤 잠들지 못한 채, 잠든 연인 곁에서, 우리는 문득 감각한다. 황인찬의 시는 바로 그 감각의 시간에 태어난다. 그리고 그 감각을 형상화하되, 해결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시가 단순한 위로시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시는 위로하지 않는다. 다만 그 불안과 함께 누워 있는다.
시는 구조적으로 이중화되어 있다. 괄호 안에 담긴 꿈의 세계와 괄호 밖의 현재. 꿈속에서 "너"는 우주 세기의 함선 위에서 물레를 돌린다. 죽음을 미루겠다고. 괄호가 닫히면 현재가 온다. 낡은 침대, 잠든 "너", 곁에 누운 돌돌이. 화자는 돌돌이를 센다. 한 마리, 두 마리. 그러나 그 셈은 끝나지 않는다. 이 이중구조는 꿈과 현실의 위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자가 동일한 구조적 논리 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물레를 돌릴 때마다 돌돌이가 늘어나는 꿈의 논리와, 돌돌이를 셀 때마다 끝없이 늘어나는 현실의 감각이 정확히 겹쳐진다. 꿈이 현실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미 꿈의 문법으로 씌어 있었다.
1. 이름의 팽창과 이름의 공백, 혹은 기표의 자기증식
시는 두 개의 극단적인 이름으로 진입한다. 김수한무와 돌돌이. 전자는 과잉이고 후자는 반복이다. 이름의 길이로 생명을 연장하려는 욕망의 표상과, 그 욕망이 도달하는 아이러니의 표상이 시의 첫 행에서 나란히 놓인다. 이 병치는 의미심장하다. 김수한무가 기표의 팽창을 통해 기의의 소멸, 즉 죽음을 지연하려는 전략의 알레고리라면, 돌돌이는 그 전략이 실패할 때 나타나는 역설의 형상이다. 이름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르고, 구르다가 굴러간다. 돌돌, 이. 이 이름은 이미 소리 안에 자신의 운명을 담고 있다.
그러나 미신임을 알면서도 물레를 돌린다. 이것이 이 시의 첫 번째 핵심적 긴장이다. 바르트가 신화의 작동 방식에 대해 말했을 때, 그는 신화가 설득이 아니라 자연화를 통해 작동한다고 했다.¹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을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그것에 의문을 품는 것 자체를 낯설게 만드는 것. 이름이 길면 오래 산다는 믿음은 정확히 그런 신화적 구조를 가진다. 그 믿음의 근거 없음을 안다고 해서 믿음이 소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근거 없음을 알면서도 작동하는 믿음, 그것이 신화의 가장 완고한 형태다. 시의 "너"가 미신을 조소하면서도 물레를 멈추지 않는 것은 이 신화적 구조 안에 이미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언어로 말하자면, "너"는 신화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신화 안에 살고 있다.
이 사로잡힘이 단순한 미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은, 시가 이 믿음에 부여하는 감정적 무게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꿈이 너무 안 좋았어." 이 구절이 핵심이다. 미신을 믿지 않는다는 선언과 꿈이 안 좋았다는 고백 사이에는 논리적 모순이 없다. 그러나 감정적 층위에서 이 두 발화는 서로를 침식한다. 꿈이 안 좋았다는 것은 불안이 실재한다는 것이고, 불안이 실재하는 한 그 불안을 달래는 주술적 행위도 실재적 힘을 갖는다. 믿지 않으면서도 돌리는 물레는, 그래서 사실은 가장 절박한 형태의 믿음이다. 이성이 포기한 자리에서도 손은 멈추지 않는다.
김춘수는 이 손의 행위,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 「꽃」
호명이 존재를 완성한다는 이 테제는 낭만주의적 언어관의 극점이다. 이름과 존재 사이의 일대일 대응, 기표가 기의를 온전히 포획한다는 믿음. 그러나 황인찬의 시에서 이 믿음은 이미 훼손된 이후의 세계를 살고 있다. 소쉬르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자의적이라고 선언했을 때,² 그는 김춘수의 세계를 해체하는 언어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돌돌이라는 소리와 그 강아지 사이에는 아무런 자연적 결속이 없다. 그것은 합의의 산물이고, 합의는 언제든 다른 존재에게 이전될 수 있다. 이름의 자의성은 이름의 무한한 이전 가능성을 함의하며, 그 이전 가능성이 꿈속에서 폭발적으로 실현될 때, 돌돌이는 끝없이 복제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시인이 "끝없이 늘어나는 돌돌이"가 아니라 "끝없는 이름을 가진 돌돌이가 끝없이 늘어나고"라고 썼다는 점이다. 이름도 끝없고, 개체도 끝없다. 이름과 개체가 함께 증식한다. 이것은 하나의 이름 아래 복수의 개체가 묶이는 상황이 아니다. 이름 자체가 증식하면서 개체를 찍어내는 상황이다. 기표의 자기증식. 이름이 존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존재를 생산한다. 이 순간 언어와 존재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된다. 김춘수에게서 이름은 존재를 꽃으로 만들었다. 황인찬에게서 이름은 개를 복사한다. 이 차이는 두 시인 사이의 시학적 거리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믿음이 가능했던 시대와 그 믿음이 이미 고갈된 시대 사이의 역사적 거리다.
백석의 시어들은 이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조명한다.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멫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백석 시인, 「가즈랑집」
백석의 이름들은 세계를 고정하는 못이다. 그 이름들이 얼마나 낯설고 지방적인 것이든, 이름이 붙은 것들은 시 안에서 단단하게 자리를 잡는다. 이름은 기억을 봉합하고 세계를 결속한다. 그러나 황인찬의 세계에서 이름은 봉합하지 못한다. 오히려 봉합선을 따라 찢어진다. 백석이 이름으로 세계의 소멸에 저항했다면, 황인찬은 이름이 그 저항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꿈속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이 발견은 시인 혼자의 것이 아니다. 독자는 이 시를 읽으면서, 자신이 이미 감각하고 있었으나 언어화하지 못했던 것이 여기에 있음을 인지한다. 이름이 사랑하는 것을 붙잡아두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는 이름을 부른다는 것.
시의 마지막 이미지는 이 논리의 극한에서 도달하는 장면이다. "먼 곳에서 이름 모를 개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름 모를 개가 이름 모를 누군가를 부른다. 발화는 있으나 지시는 없다. 호명의 구조가 유지되지만 호명의 기능은 정지한다. 이것은 언어의 실패인가, 아니면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인가. 시는 이 물음을 닫지 않는다. 다만 화자는 "가만히" 듣는다. 이 부사 하나가 이 시의 윤리적 입장을 결정한다. 가만히 듣는다는 것은 해석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되,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의 실패 앞에서 귀를 닫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언어의 소리를 끝까지 받아들이는 것.
2. 복제의 존재론, 혹은 동일성이라는 폭력
돌돌이가 두 마리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꿈의 기이함이 아니다. 그것은 물레를 돌리는 행위, 죽음을 미루려는 반복적 충동과 직접 연동된다. "꿈속에서 네가 물레를 돌릴 때마다 / 끝없는 이름을 가진 돌돌이가 / 끝없이 늘어나고." 이 연결의 논리는 역설적이다. 생명을 연장하려는 욕망이 동일한 존재의 지속이 아니라 복수의 존재를 생산한다. 하나의 돌돌이를 오래 살게 하려는 욕망이 역설적으로 돌돌이를 여럿으로 분열시킨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내장한 구조적 아이러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이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지속이란 무엇인가. 어제의 돌돌이와 오늘의 돌돌이는 같은가. 같은 이름으로 불리니까 같다고 말하는가.
들뢰즈는 반복이 동일성의 재생산이 아니라고 말했다.³ 반복은 매번 차이를 생산하며, 반복되는 것은 같은 것의 되풀이가 아니라 차이 자체의 운동이다. 이 명제를 황인찬의 시에 적용하면, 시간을 가로질러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들은 사실 서로 다른 존재들이다. "돌돌이"라는 이름은 그 차이들을 억압하는 폭력적 동일화다. 동일성이란 차이들의 망각에 기반한 허구적 구성물이며, 이름은 그 허구를 유지하는 장치다. 꿈속에서 돌돌이가 끝없이 복제되는 것은 이 억압이 해제되는 순간이다. 낮 동안 "돌돌이는 하나"라는 동일화 아래 억압되어 있던 차이들이, 꿈의 논리 안에서 폭발적으로 가시화된다. 복제는 무질서가 아니라, 동일성의 허구가 걷혔을 때 드러나는 존재의 진실이다.
윤동주는 거울 앞에서 이 동일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통과했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윤동주 시인, 「참회록」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 윤동주는 그 균열을 부끄러움으로 경험하면서, 그럼에도 하나의 나를 유지하려는 의지를 시 전체에 각인했다. 부끄럼 없는 단일한 자아를 향한 그 열망은 처절하다. 처절하다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황인찬의 시에서 그 처절함은 부재한다. 단일한 자아를 유지하려는 의지 자체가 이 시에는 없다. 대신 있는 것은 조용한 현기증, 의지의 해제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어야만 했을까 / 생각하면서 / 생각하지 않으면서." 이름이 무엇이어야 했는지를 묻는 이 구절은, 이름이 존재에 선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름은 항상 사후적이고 부분적이며 존재 전체를 포획할 수 없다는 것을 내파적으로 폭로한다. 윤동주가 거울 속에서 하나의 나를 찾으려 했다면, 황인찬은 "너"의 이름이 무엇이어야 했는지 묻는 것 자체로 이름의 필연성을 의심한다.
라캉은 주체가 언어 속으로 진입하는 순간 무언가를 잃는다고 말했다. 언어 이전의 충만한 존재, 기표로 분절되기 이전의 실재는 언어를 획득하는 순간 영구히 상실된다. 이름을 갖게 된다는 것은 이름 이전의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기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억압된 채 존재하면서, 언제나 귀환하려 한다. 꿈속에서 돌돌이가 끝없이 복제되는 것은 이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이름이라는 틀 안에서 보이지 않게 된 존재의 과잉이, 꿈의 논리 안에서 증식의 형태로 귀환한다. 돌돌이는 "돌돌이"라는 이름 안에 다 들어가지 않는다. 그 넘쳐흐르는 부분이 복제를 낳는다. 그리고 이 논리는 돌돌이에서 "너"에게로, "너"에서 화자 자신에게로, 그리고 독자에게로 조용히 번진다. 이 시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독자 자신이 이미 그 복제의 논리 안에 있음을 감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는 이 논리의 극단적 형상화다. 레이는 복제된 존재이고, 한 명의 레이가 소멸할 때마다 다른 레이가 소환된다. 이름은 유지되고 기억의 일부는 이어지지만, 그것이 같은 레이인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다. 레이 자신도 마찬가지다. 에반게리온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은 이 불확실성이다. 황인찬의 돌돌이와 레이가 공유하는 것은 이름과 개체 사이의 균열, 동일성의 보증이 불가능한 상태다. 그러나 에반게리온이 이 상태를 포스트아포칼립스적 거대 서사 안에서 다룬다면, 황인찬은 그것을 낡은 침대 위에서, 잠결에, 다룬다. 이 스케일의 차이야말로 황인찬의 시가 에반게리온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장소에 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복제의 불안은 우주 세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낡은 침대 위에서, 양을 세듯 개를 세는 밤에,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다.
3. 꿈현실의 위상학적 연속과 불안의 구조
꿈과 현실의 경계가 이 시에서 불안정하게 처리된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그러나 이 불안정성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목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더 세밀하게 추적할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가 지난밤 네가 꿨던 꿈"이라는 구절은 경계를 선언하면서 동시에 경계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경계를 명시적으로 선언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 경계가 자명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선언 이후에도 꿈의 논리는 현실 속으로 계속 스며든다.
프로이트는 꿈작업이 각성 상태의 사고와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했다. 꿈속에서 처리되지 못한 불안은 각성 상태에서도 계속 작동한다. 이 시에서 꿈속의 불안은 "꿈이 너무 안 좋았어"라는 한 문장 안에 압축되어 있다. 그 불안이 무엇인지는 특정되지 않는다. 함선의 항행인지, 우주 세기의 어둠인지, 아니면 그것들을 통해 형상화된 더 근원적인 무언가인지. 불안의 내용이 비워져 있기 때문에, 독자는 자신의 불안을 그 자리에 채워 넣는다. 이것이 이 시의 가장 정교한 수사학적 전략이다.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보편화한다. 꿈이 안 좋았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잠들지 못한 채 누군가의 곁에 누워 있었던 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불안은 우주적 스케일과 지극히 미시적인 현재의 병치를 통해 더욱 증폭된다. "초장거리 아광속 항행"과 "낡은 침대". 이 두 이미지 사이의 거리는 측정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는 이 거리를 비극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주 세기도 어딘가의 낡은 침대에서 꾸는 꿈이라는 것, 낡은 침대야말로 우주 세기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라는 것을 조용히 제시한다. 거창함과 소소함의 위계가 해체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해체는,
우주 세기는 아니어도 창밖으로 펼쳐진 밤하늘에는 오래전 사라진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고
라는 구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사라진 것이 빛으로 남는다'는 위안의 수사로 읽는 것은, 이 구절이 숨기고 있는 공포를 외면하는 일이다. 별빛은 물리적 사실이다. 빛의 속도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보는 별은 수천 년 전에 이미 소멸한 별의 잔상이다. 별은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린 빛, 즉 부재의 증거다. 이 사실을 낡은 침대 위에서, 잠든 연인의 곁에서 떠올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시인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적 귀결은 하나다. 지금 내 곁에 누워 있는 "너" 또한, 내가 지금 감각하고 있는 이 "너"가, 이미 사라진 무언가의 빛일 수 있다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이 실재하는 존재인지, 아니면 내게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린 빛의 잔상인지를, 나는 알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황인찬이 별빛이라는 물리적 현상을 끌어들이는 것은 정확히 이 공포를 자연법칙의 층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내가 너를 잃을지 모른다는 감정적 불안이 아니라, 내가 지금 너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늦은 것일 수 있다는, 인식론적 공포. 별빛이 도달하는 동안 별이 사라지듯, "너"에 대한 나의 감각이 형성되는 동안 "너"는 이미 다른 존재가 되어 있을 수 있다. 나는 항상 사라진 것의 빛을 사랑하고 있다. 이것이 이 구절이 품고 있는 무서운 통제력이다. 시인은 존재론적 공포를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물리학의 언어로 제시함으로써, 그 공포를 반박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슬프다거나 두렵다거나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오래전 사라진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고 쓴다. 이 냉정함이 이 구절을 이 시에서 가장 잔인한 순간으로 만든다.
스폰지밥의 비키니 바텀은 이 논리의 전도된 형상이다. 그 세계의 거주자들은 매 에피소드마다 리셋된다. 망각이 구조이고 연속성이 예외인 세계. 이름은 캐릭터를 고정하지만 그 이름이 붙들고 있는 것은 매번 새로 태어나는 존재다. 비키니 바텀의 밝음은 망각으로부터 온다. 반복이 무게를 갖지 않는 세계, 어제의 돌돌이와 오늘의 돌돌이 사이의 차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 세계. 그러나 황인찬의 시는 그 밝음을 모방하지 못한다. 아니, 모방하지 않는다. "돌돌이가 한 마리 / 돌돌이가 두 마리"의 리듬이 아무리 부드럽다 해도,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시는 알고 있다. 황인찬의 시가 스폰지밥의 망각 대신 선택하는 것은, 불안과 함께 눕는 것이다. 해소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4. 이름 없는 부름의 윤리, 혹은 포획되지 않는 것들을 향한 귀
시의 마지막 행으로, 다시, 돌아온다. "먼 곳에서 이름 모를 개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 문장은 시 전체의 논리를 응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과한다. 이름 모를 개. 이름을 부여받지 않은 존재. 시는 이 개에게 끝내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지 않음으로써 이 개는 복제를 피한다. 돌돌이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끝없이 복제되었다. 이름 없는 개는 복제될 수 없다. 이름이 없으면 동일화가 불가능하고, 동일화가 불가능하면 복제도 불가능하다. 이름 없는 존재는 단 하나이면서 동시에 이름으로 포획되지 않는 모든 존재를 대표한다.
그리고 이 이름 없는 개가 "누군가를 부른다". 부르는 자도 이름이 없고 불리는 자도 특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완전한 호명의 실패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확히 이 실패 속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 이름 없는 자가 이름 없는 자를 부를 때, 그 부름은 특정한 존재를 향한 것이 아니라 부름 자체로 존재한다. 지시 기능이 정지된 자리에서 발화의 순수한 사건성만이 남는다. 이것은 언어의 영도(零度)이자, 역설적으로 언어가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이다. 이름으로 포획하려는 욕망을 버린 자리에서, 부름은 순수한 관계의 몸짓이 된다.
화자는 그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이 부사가 결정적이다. 가만히 듣는다는 것은, 그 소리를 해석하거나 이름 붙이거나 포획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가 실패하는 자리에서도 귀는 열려 있다는 것. 이것이 이 시가 도달하는 윤리적 입장이다. 이름으로 붙잡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름 없는 부름에 가만히 귀를 여는 것. 돌돌이가 끝없이 복제되더라도 지금 침대에 누운 이 돌돌이를 곁에 두는 것. 별이 이미 죽었더라도 그 빛을 올려다보는 것. 이름이 존재를 붙잡아두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름을 부르는 것.
윤동주는 자기 생을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려 했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윤동주 시인, 「참회록」
이름과 존재가 일치할 수 있다는 믿음, 삶이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믿음. 황인찬의 시에서 그 믿음은 가능하지 않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어야만 했을까." 이 물음은 답을 원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어떤 답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던지는 물음이다. 답이 있다면 그 순간 이름은 고정되고, 이름이 고정되면 존재는 이름 안에 갇히고, 이름 안에 갇힌 존재는 이름보다 큰 자신의 잉여를 잃는다. 물음이 열려 있는 한, 이름은 유예되고, 존재는 이름보다 조금 더 클 수 있다.
이것이 이 시의 궁극적 역설이다. 이름이 존재를 포획하지 못한다는 것이 비극이지만, 동시에 그 실패가 존재를 이름보다 크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 돌돌이는 "돌돌이"라는 이름 안에 다 들어가지 않는다. 그 넘쳐흐르는 부분, 이름 밖으로 삐져나오는 부분이야말로 우리가 진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은 이름으로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은 항상 실패하고 항상 계속된다. 낡은 침대 위에서, 잠든 연인 곁에서, 창밖의 죽은 별빛 아래서, 이름 모를 개의 소리를 가만히 들으면서. 이것이 황인찬의 시가 말하는 것이다. 아니, 말하지 않으면서 살아내는 것이다. 시는 이 역설을 논증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언어의 가장 취약하고 가장 정직한 자리에서, 거의 잠결에, 실천한다.
참고문헌
¹ Roland Barthes, Mythologies (1957). 바르트는 신화가 역사적으로 구성된 의미를 자연적인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언어 내부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² Ferdinand de Saussure,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1916).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자의적(arbitraire)임을 언어학의 제1원리로 제시하며, 이름과 사물 사이의 자연적 결속이라는 환상을 해체했다.
³ Gill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8). 들뢰즈는 동일성에 종속된 반복 개념을 해체하고 반복이 매번 차이를 생산한다는 존재론적 명제를 전개했다.
⁴ Jacques Lacan, Écrits (1966). 라캉은 주체가 상징계에 진입하는 순간 실재(le Réel)를 상실하며, 억압된 실재는 끊임없이 귀환하려 한다는 구조를 정신분석의 핵심 테제로 제시했다.
⁵ Sigmund Freud, Die Traumdeutung (1900). 프로이트는 꿈작업(Traumarbeit)이 각성 상태의 사고와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꿈 안에서 처리되지 못한 불안은 각성 상태에서도 지속적으로 작동함을 주장했다.
*사진은 Ai로 그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