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은 후회를 낳고

by 홍홍강

국민학교 5학년 때다. 금년만큼이나 무덥던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 같은 반 친구 대여섯 명이 모여 고등부 축구시합을 구경하기로 했다. 공부깨나 한다는녀석들이고, 우리가 사는 달도네에서 떨어진 곳에 사는 부잣집 애들이다. 딱히 축구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늘 그렇듯이 몇몇이 그냥 뭉쳐 다니며 노닥거리는 재미가 쏠쏠해서다.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여서 재잘거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삐 걷는다. 봉화산기슭의 회원국민학교에서부터 축구경기장까지는 십리가 좋게 되는 거리다. 자동차는 가끔씩 다니고, 사람들의 왕래도 잦지 않은 마산변두리의 비포장 단차로길이다. 우리가 옆으로 늘어서서 당당하게 점령하고는 시답잖은 얘기로 중구난방 시끌벅쩍하다.


우리 앞쪽에서 멀찌감치 남루한 차림에 빈 바지게를 지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분이 있다. 많이 지친 모습이다.

틀림없는 우리 아버지시다. 마산어시장의 이른 새벽, 생선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지게꾼 우리 아버지는 거기까지 걸어가야 한다. 오늘도 새벽 일찍 우리가 잠든 시간에 씨락국밥(시래깃국밥) 한 그릇을 드시고는 바지게를 지고 늦지 않게 가셨을 게다. 오늘은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 일을 끝내시고 오시나 보다.


아버지를 만났으니 달려가서 반갑게 인사드리고, 친구들한테도 인사를 시켜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그러질 않았다. 입을 꾸욱 다물고 친구들 뒤로 뒤로 숨었다. 아버지 곁을 그냥 숨어서 지나쳤다.

비린내 나는 남루한 차림에 바지게를 진 저 초라한 분이 우리 아버지라는 게 부끄러워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정직하고 당당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던 아버지를 배반한 것이다. 아들을 기죽이지 않으려고,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우리 아버지. 부모말 잘 듣고 예의 바르며, 공부 일등하는 아들이라고 자랑하시는 아버지를 배반한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셨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셨을 거다.

잘못을 깨닫고 바로 용서를 구했으면, 아버지는 용서하셨을 것이고, 나는 개과천선 했을 텐데. 기회를 놓치고 지금에 이르고 말았다. 말씀드리면, 내게 대한 아버지의 기대가 무너져서 더 괴로우실 수도 있으니, 그냥 넘어가자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

아버지에 대한 어릴 적 배반은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후회로 남는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아버지.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복날이면 떠오르는 아이스께끼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