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침대 위에서 나는 자주 같은 고민을 했다. 지금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리면 우리는 영영 볼 수 없는 사이가 되는 걸까. 그는 화를 낼까, 아니면 아무 일 없다는 듯 내 손을 잡아줄까. 이 질문은 늘 내가 방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냉장고에 붙어있는 사진들을 볼 때면, 사진 속의 내가 마치 스스로를 비웃는 사람처럼 보여 결국 다시 그의 쪽으로 돌아눕곤 했다.
나는 그의 살에서 나는 향을 좋아했다. 동시에 그 향의 정체가 늘 궁금했다. 욕실 한켠에 놓인, 누가 사줬는지도 모르는 명품 바디워시의 잔향인지, 아니면 그가 샤워하듯 무심히 뿌려대던 향수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나는 불안한 생각이 들 때면 자주 그의 살에 얼굴을 묻었다는 사실이다. 그 향은 내가 그 관계에 머무를 수 있게 하는 가장 쉬운 이유로 느껴졌다.
그는 자주 막걸리를 마셨다. 쉬는 날, 나와 함께 눈을 뜬 아침에도 그는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다. 대신 냉장고로 성큼성큼 걸어가 막걸리를 꺼내 마시며 “답답해서”라고 말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는 나와 있는 시간들을 온전히 사랑으로 채우지 못했고, 나는 모른 척하려 애썼던 것 같다.
그럴 때면 나는 일부러 벽 쪽으로 돌아눕곤 했다. 나를 한 번쯤은 바라봐 주길, 따라 누워 안아주길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울음이 터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명치가 뚫린 것처럼 아픈 감각은 오래 남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통증이었다.
집 안에는 늘 공기청정기 소리가 돌고 있었다. 관계가 희미해질수록 그는 담배를 더 자주 태웠고, 적막이 찾아올 때마다 기계음만 방 안을 채웠다. 담배꽁초는 집 안 여기저기에 쌓여갔고, 나는 그때마다 마치 내 잘못을 정리하듯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도 명치가 아려올 때마다 담배를 피웠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아픔을 모른 채, 혹은 알면서도, 대신 치워줄 수 있는 것들을 치우며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건 아닐까. 떠나지 못한 이유는 사랑이었을 수도 있고, 익숙함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건, 나는 그때 그 방 안에서 나가지 않는 선택을 반복하며 오랫동안 그의 옆에서 불안해하길 선택했던 것이다.
한참이 지난 후에 그를 다시 마주 봤을 땐, 처음 본 사람 같은 설렘이 들었다. 처음엔 반가움에 안아주고 싶었지만, 또다시 그의 방에서 밥을 먹는 시간 내내 내가 왜 그와 헤어져야 했는지 조용히 깨닫게 됐다. 아무 말 없던 그도 같은 생각이었을 거라고 느꼈다. 이야기를 할수록, 꺼내면 안 되는 얘기가 우리의 입을 다물게 했고, 서로 더 이상 상처 주지 않기 위해 헤어져야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겨울에 다시 만났지만, 그 겨울은 없었다. 우린 각자의 겨울 속에서 각자 따뜻하게 보낼 방법만 찾고 있었다.
새로운 겨울을 보내고 있을 그에게. 나는 잘 지낼 테니, 오랫동안 버리지 못한 내 분홍색 칫솔도 그만 버리고, 나를 쉽게 잊어달라고 말해두고 싶다. 기억될수록 아픈 겨울은 이제 그만 보내주자고.
떠나지 않는다는 선택은 종종 사랑으로 오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