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질질 끌며 가는 이유에 대하여
"아까 전화 주셨던 분인가요?"
처음 체육관을 갔을 때 관장님의 인사말이었다. 그때의 나는 잘못 온 거 같다는 생각과 맞다는 말을 하며 동시에 꾸벅 인사를 했다. 옛날부터 해보고 싶었던 주짓수였기에 꾸준히 갈 요량으로 집 근처에서 찾고 찾아 mma와 주짓수를 같이 하는 체육관을 찾아 이쁜 도복도 찾아 놓은 상태로 기대하면서 간 체육관에서 만난 사람은 굉장히 당혹스러운 감정을 주는 사람이었다. 노랗고 긴 머리와 몸에 가득한 문신을 한 남성분이 나에게 인사했다. 주짓수 하는 유튜브 영상들에서는 항상 도복을 입은 채로 스파링을 하는 것만 본 나에게 이 체육관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첫날이니 만큼 무엇인가를 배울까 기대하면서 간 도장에서 첫날부터 스파링을 시키는 관장님을 뒤로하고 프로준비를 하고 있다는 동갑 친구에게 오늘이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표정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친구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이 자기를 못 나오게 누르라는 말을 끝으로 첫날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첫날이어도 체급과 운동을 아예 안 했던 것은 아니기에 한 두 판을 이겨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이기기는커녕 4분의 시간 동안 탭을 5번 미만으로 치면 다행인 정도였다. 그나마 희망을 가졌던 여성분과의 스파링은 뭘 당하는지도 모르는 채 탭만 치길 연속하던 날이 어느새 2년 전이 되었다.
그동안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처음 갔을 때 무섭던 사람들이 익숙해지고 체육관의 땀냄새가 익숙해지고 새로운 관원분이 오면 내가 스파링을 잡아줄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관장님이 앞으로 부르셨다. 2년간 다니면서 그랄하나 못 받아봤기에 드디어 그랄을 받는구나 싶어 앞으로 걸어나갔을 때 관장님의 손에 블루벨트를 보게 되었다. 벨트를 매어주며 사실 그랄을 줬어야 되는데 자꾸 까먹어서 이제야 블루벨트를 준다는 말을 하시며 나의 어깨를 툭 쳐주셨다.
이미 낡은 티가 나는 도복과 흩트리진 머리와 대비되어 새로 받은 빳빳한 벨트를 보며 뭔가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아직 이 정도 실력이 아닌 거 같은데라는 고민을 아는 형에게 말하니 나에게 한마디 말을 해줬다. "야 너 처음 왔을 때 아직도 기억난다. 등치 산만한 애가 순딩하게 생겨서 얼마 안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2년 다녔어. 지금 봐봐 너 처음 왔을 때 있던 사람들 반도 없을걸. 꾸준히 나오는 것도 어렵고 이제 너 탭도 거의 안 치잖아 받을 만해서 받은겨"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 형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내가 이 운동을 계속하는 이유는 거창한 무도 정신이나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저녁 도복을 챙겨 입고 매트 위에 서는 그 순간만큼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복잡한 학업 고민도,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땀방울과 함께 매트 바닥으로 떨어진다. 상대의 깃을 잡고 다음 수를 고민하는 순간에는 오로지 나의 호흡과 근육의 움직임에만 집중한다. 그 지독한 몰입의 끝에 오는 개운함은 그 어떤 휴식보다 달콤했다.
처음엔 그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취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주짓수는 내 삶의 태도를 조금씩 바꿔놓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던 스파링 시간을 버텨내고, 수없이 '탭'을 치며 패배를 인정하는 법을 배우고, 다시 일어나 빳빳한 새 벨트를 허리에 맸다. 결국 내가 운동을 하는 이유는, 매트 위에서 보낸 그 정직한 시간들이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블루벨트라는 색깔이 어색하고 과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 도장에 왔을 때 느꼈던 그 막막함을 2년이라는 꾸준함으로 지워냈듯, 이제는 이 푸른색이 내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다시 땀을 흘릴 준비가 되었다. 낡아버린 도복 위에 새로 묶인 선명한 파란색 벨트를 고쳐 매며, 나는 오늘도 신발을 질질 끌며 도장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