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가 "시가 내게로 왔다"고 했을때

by 이강선

느낌에서 나의 언어로: 네루다가 "시가 내게로 왔다"고 했을 때 일어난 일


1. 희미한 것을 붙드는 일


네루다가 "시가 내게로 왔다"고 했을 때, 단순히 '시'라는 결과물이 도착한 것을 말한 게 아니다. 시는 구체적인 물건이 아니다. 시는 체험이고, 느낌이고, 이미지이자 추상물이고 언어다. 네루다가 시가 왔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 모든 총체를 묶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가 언제 왔는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떤 어휘를 알게 되고, 어떤 사건을 겪고, 그 사건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인식 속에 박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무엇이 시가 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감정이었는지, 이미지였는지, 기억이었는지, 혹은 반복된 경험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결국 그것은 철저한 내적 체험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이 희미했다는 점이다. 시작은 어렴풋했다. 그래서 그는 그 감각, 그 어렴풋한 것이 주는 느낌을 붙들었다. 한 번인지 두 번인지, 아니면 수백 번인지 알 수 없다. 한번에 선명해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수천 번이 쌓여서 선명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수십 년이 지난 이후에야 비로소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쌓이고 쌓여 분명해진 그 느낌을, 그는 붙들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다 말고 산책하러 나가는 것처럼. 내가 산책하러 가는 것은 그 느낌을 몸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 말고 나가는 행위 역시 하나의 '느낌'이다.


나는 지금 이 느낌을 글로, 몇 마디 단어로 붙들어 놓고 나간다. 아마 그냥 나가면 잊어버릴 것이다. 어디에 가나 사물이 있고 사건이 있으므로, 그런 것들이 나의 주의를 가져갈 것이다. 그러나 붙들어 두었으므로 이 느낌은 살아 있다. 돌아와서 다시 책상에 앉으면 내가 쓰려던 것이 다시 떠오를 것이다. 마치 번개처럼 뇌리에 박혀 있을 것이다. 단, 어렴풋한 채로.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즉 내가 기록한 것은 '그 순간의 메모'다.


메리 올리버는 노트에 '그 순간'을 기록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시로 완성되어 나왔을 때라도, 자신이 진정 돌아가고 싶은 곳은 시가 아니라 '그 순간'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 의미를 안다. 그 순간은 그것을 느끼고 감각하던 살아있는 시간이다. 나는 어제 그 경험을 메모해 두었다. 그 메모를 읽으면 그때의 순간이 떠오른다. 순간이 나의 느낌을 맡아두고 있는 것이다.



2. 몸은 감각을 기억한다


이제 나는 돌아와 다시 앉았다. 봉제산에 가서 맨발로 걷고 왔다. 차가운 바닥을 걸었으므로 발바닥이 아직 후끈거린다. 밖은 영상 1도, 그러나 산은 기온이 더 낮다. 게다가 맨발로 걸었으므로 강제로 주의가 집중된다. 다른 곳에 신경 쓸 틈이 바늘 끝만큼도 없다.


땅은 원래 그대로지만 나는 땅은 점차 차가워졌다고 느꼈다. 나 대신 땅에게 감각을 전가시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산길을 걸으면서 땅이 차가워졌다가 시리다고 느꼈고 마침내는 아리다고 느꼈다. 발가락은 빨갛게 얼었다. 발바닥이 '차갑다'와 '시리다'와 '아리다'.


감각이 그렇게 차이가 난다. 오직 겨울에만, 맨발일 때만 느낄 수 있는 미세한 이 감각 차이는 어느 아름다운 실내에서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경험은 머리를 맑게 한다. 오로지 몸에만 집중하는 이 경험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내 몸은 이 감각을 기억한다. 내가 훗날 '겨울철 맨발 걷기'라고 말할 때, 내 몸은 다시 이 '시리고 아린' 감각을 불러올 것이다.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나가기 전 마구 써 내려갔던 글, 오자와 탈자와 비문들을 들여다본다. 선명하다. "그래서..." 하고 다시 시작한다.




3. 사물이 언어가 될 때


그래서 네루다가 말한 것은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 것이고 메모를 했을 것이며, 나처럼 무언가 다른 일을 하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돌아와 그는 그 느낌을 꺼내기 시작한다.


우선 단어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단어와 연관된 온갖 것들을 끄집어낸다. 감각, 날씨, 기억, 감정, 사건, 모든 것이다. 발이 시리거나 추웠거나, 혹은 작년에 보았던 나무거나 새소리거나. 그 사건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거나.


아니, 엄밀히 말해 사건은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내가 그 사물을 바라보았고, 기억해 두었으며, 그래서 그 사물이 이야기를 갖게 된 것이다. 내가 기억해 두었으므로. 혹은 내가 그 물건을 여기서 저기로 옮겼으므로. 혹은 그 나무껍질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졌으므로.


봉제산에 가면서 수많은 사물을 만난다. 그중 하나가 무화과나무다. 매번 지나가면서 무화과가 자라는 모습을 보았고 냄새를 맡았다. 봄부터 여름까지. 그리고 지금, 겨울의 무화과나무 껍질이 매끈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해서 무화과는 내 안에서 언어를 갖게 되었다.


그런 것이다. 무화과나무라는 이미지, 잎사귀와 냄새, 과일, 색깔, 그리고 이제는 껍질의 촉감까지. 그런 것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익었고, 지금 이 순간 어휘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것들은 흔하디흔하다. 무화과나무가 드물다면 모과나무로 바꾸어도 된다. 모과나무가 없다면 배롱나무, 혹은 무궁화. 지나가는 길에 있는 온갖 나무들 중 어느 하나로.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집들, 빌라들, 사무실들, 건물들, 예를 들면 무인 빨래방 같은 것들이 전부 이야기를 갖는다. 지난해까지 건강식품을 팔던 빌라의 어느 세대 하나가 오늘 보니 로또 판매점으로바뀌었다는 것, 그렇게 되면 그런 사물들은 언어를 갖게 되며 의미를 띠게 된다. 그 사물들은 어두워지면 가로등이 될 것이고 달이 될 것이고, 어두운 하늘이 될 것이며, 별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인은 그 사물에 자신의 감정을 넣는다. 이른바 '객관적 상관물'이다. 무화과나무는 매끈한 껍질 덕분에 '아름다운 여인'이 될 수도 있고, '뺀질뺀질한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 비에 젖은 무거운 신문지는 슬픔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관찰이고, 느낌이며, 감각이다. 그리고 이미지다.




마침내 그것은 언어가 된다. 나의 언어인 것이다. 내 삶에서, '나'라는 몸을 거쳐 나온, 나의 빛깔을 띤 고유한 언어가 된다. 지금 이 글은 내가 아주 단순한 느낌을 붙들었기 때문에 나온 글이다. 메모 하나, 네루다, 시가 내게로 왔다는. 그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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