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들여다볼 때: 경이에서 경외까지

by 이강선


가끔 컴퓨터의 바탕화면은 놀라운 일들을 띄워줍니다. 사실은 거의 매번 그러합니다. 지금 제가 윈도우 바탕화면에서 보고 있는 것은 박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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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사람들은 낙엽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다른 이는 나비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박쥐의 날개 색깔이 갈색인데다가 혈관이 지나가는 길이 마치 그물처럼 보였기에 나온 대답이었지요.


저도 그러했습니다. 이 사진을 되풀이해서 오래도록 들여다보지 않았더라면요. 아니 여러 번 보았지만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습니다. 바탕화면보다는 내가 해야 할 일에 더 관심이 쏠렸던 탓입니다. 으레껏 거기 있는 것,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실 바탕화면은 아주 아름다운 사진들로 가득한데 말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 사진에서 어떤 사실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왜 그게 왜 눈에 들어왔는지는 모릅니다. 경외심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서일까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배의 중간 즈음에 무언가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그것, 그것은 단순한 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새끼였습니다. 어미박쥐가 새끼를 매달고 날아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조금 더 들여다보니 새끼는 어미의 배에 눈을 꼭 감고 매달려 있었습니다.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며칠 전에 보았던 다른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암컷 고래들이 어미의 출산을 돕기 위해 몰려든 장면이었지요. 열 마리나 되는 암컷 고래가 출산을 돕기 위해 모였다고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끼 고래가 태어나자 새끼를 밀어올려 물위에 떠 있게 해주었습니다. 코에서 코로 옮겨가면서 무려 한시간 동안이나 말입니다. 경이로운 일이지요.


그런 일들이 무수히 일어납니다.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던 시인 제인 케년은 평범한 어느 날을 노래합니다. 우울증 약을 먹었더니 방충망을 통과해 들어온 새 소리가 아름답더라는 것이지요. 삶의 도처에 존재하는 신비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우울증 환자가 약을 먹고 나니 평범한 모든 것이 경이로워 보인다는 것 말이지요.


우리는 알기 때문에 경이를 느끼고,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경외를 느낍니다.


때로 우리는 어떤 장면 앞에서 압도됩니다. 그러나 그 압도는 단순한 감각의 충격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의미와 맞닿을 때 깊어집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 의미를 완전히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멈추게 됩니다. 그 멈춤이 곧 경외입니다.


윌리엄 워스워즈가 알프스를 넘으며 느낀 감정은 단순히 산이 크고 높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사계절이 함께 하는 풍경을 보면서 자연의 질서와 숭고함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에, 그는 그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외감』의 저자 다커 켈트너가 남동생의 죽음을 마주하며 느낀 경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이해하려 할수록 더 깊은 한계에 부딪히게 합니다.


우주의 별을 바라볼 때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먼 거리와 시간을 품고 있는지 아는 사람에게 별은 더 이상 단순한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광막함을 끝내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그 지점에서 경외가 생겨납니다.


티베트 승려, 린포체가 70여쪽이나 되는 긴 경전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할 때,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경탄합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은 단순한 반복일 뿐입니다. 또한 먼 옛날 자신 민족의 문자를 만들어 경전을 번역한 이의 노고 역시, 그 맥락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만 깊은 울림을 줍니다.


노숙자를 위한 '민들레 국수집'을 운영하는 수사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오싹하는 경이를 느낍니다. 자발적인 지원을 거쳐 십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운영되어온 그 식당은 초라하지만 경이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누군지 모를 이를 위해 베푸는 선행들이 쌓여 가는 곳이지요.


타지 마할(Taj Mahal)의 아름다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사랑과 죽음의 기억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멈추어 서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은 그저 하나의 건축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경이는 대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마주하는 우리의 인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 경이로워지고, 다 알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비로소 경외하게 됩니다.


저 박쥐가 새끼를 매달고 날아가는 것은 새끼를 보호하기 위함임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여전히 그 사실은 경이롭습니다. 핏줄이 보이는 얇은 날개, 그처럼 약해 보이는 날개로 자신뿐 아니라 새끼마저 지탱한다는 사실도 경이롭습니다.


이 박쥐를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얼마전 읽었던 시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박쥐/루스 피터


오, 작은 존재여,

따뜻하고 깨끗하며 사랑스러운 존재여,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어미로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여.


도처에 경이가 있습니다. 열린 이들만이 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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