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관계/ 박남준
바위 위에 소나무가 저렇게 싱싱하다니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 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흐르고 흘렀던가
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
이끼들과 마른 풀들의 틈으로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다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나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 타고 굽이치는 강물 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 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던가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문학동네 2000)
우리나라에서 바위 위의 소나무를 보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바위 위의 소나무라는 그 어휘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단단한 바위 위의 소나무라니요. 바위 위에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단단한 바위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바위 위에서 자라난 소나무를 볼 수 있고 그것도 많이 볼 수 있으니 실제는 어휘와는 다릅니다.
박남준 시인은 ‘은둔의 시인’ ‘자연의 시인’, ‘지리산의 시인’이라고 불립니다. 그에게 붙여진 이 호칭은 그와 자연과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지리산으로 옮겨가기 이전에 모악산 자락에서 17년을 살면서 자연을 노래했고 삶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글을 써서 살아가는 전업작가로, 한 달 3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이지요. 나머지는 기부한다고 합니다.
박남준 시인의 삶을 언급하는 이유는 왜 바위와 소나무의 공생을 아름다운 관계라고 보았는지 알 듯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보통 소나무의 굳셈을 언급하지요. 바위는 안중에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다릅니다. 바위와 소나무 둘 다를 마음에 두고 있지요.
바위도 소나무도 모두 굳센 존재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소나무를 십장생 중의 하나로 꼽았지요. 오래 산다고 하면 바위는 소나무보다 한결 더 오래 살아냅니다. 생명이 없는 바위를 산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바위에도 분명 변화가 있으니까요. 언제부터인가 바위로 불리고 그리고 언제인가 스러져가니까요.
두 굳센 존재인 바위와 소나무가 만났습니다. 아니 소나무가 바위에 자리 잡고 뿌리를 내렸습니다. 소나무가 바위에 자리 잡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을 테지요. 바위에 아주 작은 틈이 생기고 우연히 씨앗이 날아와 거기 자리 잡고. 그리고 소나무는 싹을 틔웁니다. 바위는 제 몸의 변화를 깨닫지만 자신을 변모시키는 그 변화를 기꺼워합니다. 몸을 틀어 싹을 품고 몸을 틀어 빗물을 더 잘 받아들이고자 노력합니다.
바위가 무언가를 품는다는 것은 곧 상처를 의미합니다. 바위는 온통 한 덩어리니까요. 바위에는 물 샐 틈이 없으니까요. 그래야만 하니까요. 그러므로 바위에게 틈이란 어느 한 점이 파고듦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군데가 부스러짐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상처가 생기는 것이지요. 상처를 기꺼워한다는 것은 곧 나의 일부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내어줌을 의미합니다.
받아들인다는 것,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을까요. 그래서 화자는 말합니다. ‘돌도 늙어야 품이 너른 법’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듯한 기세이던 젊은이가, 어디에 가나 자신을 내세우던 젊은이가 문득 깨달을 때, 그때는 세월에 많은 것이 마모되고 난 뒤일 겁니다. 모든 것이 나의 힘으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그때, 여러모로 상처를 입고 깎이고 난 뒤이겠지요.
자연은 더불어 존재합니다. 태양은 생명을 위해 열을 내어주고 바람은 구름을 위해 그 힘을 내어주고 물은 생명을 위해 생기를 내어주고 흙은 다른 존재를 위해 틈을 내어주지요. 열과 바람과 물, 그리고 흙이 없었다면 생명들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무와 풀과 꽃, 그 모든 생명이 서로를 위해 존재합니다. 젊은이가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는 것처럼 바위 또한 비바람에 깎이고 나서야 틈 하나를 엽니다. 자신의 살갗 한 부분을 포기합니다.
그리고는 그 생명을 오롯이 품습니다. 홀로 당당하기보다는 더불어 아름다운 존재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그렇게 어우러지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갈등이 오갈까요. 새싹은 뿌리를 뻗으려 바위는 거부하느라. 결국 바위가 싹을 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존재를 위해 빗물을 머금으려 노력하고 애씁니다.
자라난 소나무는 푸른 이파리를 내어 바람을 맞습니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소리를 냅니다. 지나던 새들이 문득 내려앉습니다. 간혹 노래를 하지요. 이제 바위 위에는 소나무가 굳건합니다. 바위가 소나무 씨앗 하나를 품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졌는지요.
자연은 더불어 살아갑니다. 온전히 나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자연입니다. 나이 먹은 지금, 내가 지나온 삶 어느 굽이에서 누군가를 위해 틈 하나를 내어준 적이 있는지. 아름다운 관계를 맺은 적 있는지 다시금 되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