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명상의 목적과 정호승의 「첨성대」
설화로 보는, 우리 안의 DNA 같은 은은한 슬픔
첨성대/정호승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일평생 꺼내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한단 한단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할아버지 대피리 밤새 불던 그믐밤
첨성대 꼭 껴안고 눈을 감은 할머니
수놓던 첨성대의 등잔불이 되었다.
밤마다 할머니도 첨성대 되어
댕기 댕기꽃댕기붉은 댕기 흔들며
별 속으로 달아난 순네를 따라
동짓날 흘린 눈물 북극성이 되었다.
싸락눈 같은 별들이 싸락싸락 내려와
첨성대 우물 속에 퐁당퐁당 빠지고
나는 홀로 빙빙 첨성대를 돌면서
첨성대에 떨어지는 별을 주웠다.
별 하나 질 때마다 한 방울 떨어지는
할머니 눈물 속 별들의 언덕 위에
버려진 버선 한 짝 남 몰래 흐느끼고
붉은 명주 옷고름도 밤새 울었다.
여우가 아기무덤 몰래 하나 파먹고
토함산 별을 따라 산을 내려와
첨성대에 던져논 할머니 은비녀에
밤이면 내려앉는 산여우울음소리.
첨성대 창문턱을 날마다 넘나드는
동해바다 별 재우는 잔물결소리
첨성대 앞 푸른 봄길 보리밭 길을
빚쟁이 따라가던 송아지 울음소리.
빙빙 첨성대를 따라 돌다가
보름달이 첨성대에 내려앉는다.
할아버진 대지팡이 첨성대에 기대놓고
온 마을 석등마다 불을 밝힌다.
할아버지 첫날밤 켠 촛불을 켜고
첨성대 속으로만 산길 가듯 걸어가서
나는 홀로 별을 보는 일관(日官)이 된다.
첨성대 야경. 사진 출처 금강일보 (20190612)
이 시는 우리 의식 깊이 박힌 슬픔들을 건드립니다. 우리 민족 특유의 슬픔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슬프되 드러내지 않고 기도로 승화하는 이 감정이 별이 되었고 별을 보는 이들은 그것을 읽어내는 이가 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읽고 난 이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바로 그런 탓입니다.
첨성대는 신라 시대 지어진 천문 관측대, 신라의 기념물입니다. 첨성대라는 단어를 읽자마자 단숨에 읽는 이들은 신라로 날아가지요. 첨성대를 바라보면서 할머니를 생각합니다. 그 할머니는 아마도 우리 모두의 조상, 여인들이었을 겁니다. 할머니가 흘린 눈물이 화강암 벽돌이 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왜 눈물을 흘렸을까요. 왜 그 눈물로 화강암 벽돌을 만들었을까요. 설움이 깊지만 차마 나타낼 수 없는 이들이 낮이 아닌 밤에 첨성대로, 그리고 다른 탑으로 갑니다. 탑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거나 혹은 탑을 돌면서 기도를 하지요. 밤은 기도의 시간이니까요. 밤은 영과 접하는 시간, 밤은 초월이 찾아오는 시간이니까요.
할머니들 뿐 아닙니다. 할아버지 역시 설움을, 감정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대피리를 불지요. 할아버지가 대피리를 불던 그믐밤에 여인들은 기도를 하고 또 하면서 탑돌이를 했을 겁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지요. 그 기도를 듣는 이들은 별입니다. 기도는 별이 되지요. 첨성대는 하늘의 별을 보는 곳이고 별을 관측하는 이들은 일관입니다. 그러니 별들이 일관의 눈에 담길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별이 첨성대로 내려와 일관인 화자의 눈우물에 퐁당퐁당 빠집니다. 그 모든 별을 주울 수는 없으니 일부만 줍는 게지요.
그렇게 첨성대는 기도로 모여 신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역사가 어디 순조로웠을까요. 사람들은 나라의 안녕을 빌면서 절을 짓습니다. 에밀레종을 만듭니다. 청정한 영혼을 지닌 아기를 넣어 만듭니다. 그 소리는 어쩌면 나라를 위하되 백성이 나라의 근간임을 잊은 왕들의, 스님들의, 귀족들의 오만함에 대한 경종이기도 했을 겁니다. 여우들이 나타나니까요.
우리 설화에 등장하는 여우는 상서롭지 못한 흉한 징조입니다. 신라의 삼국사기에도 삼국유사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매번 흉한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기 여우가 무덤을 파헤치니 신라가 망할 징조였을까요. 혹은 나라에 흉년이 들었을까요.
나라의 안녕과 연관되는 산여우가 나오니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했던 문무대왕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무대왕은 동해에 묻혀 계시니 그 동해의 잔물결이 연방 첨성대 창문 턱을 넘나드는 거지요. 빚쟁이 따라가던 송아지 하면 가난을 연상하지요. 한편으로는 수로부인도 연상됩니다. 설화가 무궁무진하니 시도 풍성합니다. 읽는 이도 서러운 한편 재미나지요. 설화는 우리의 의식 깊숙이 박혀 있어 마치 DNA처럼 작용합니다.
이 시에는 신라의 이야기가 곳곳이 박혀 있습니다. 첨성대만이 아닌, 그것이 별을 보던 천문관측대라는 사실만이 아닌 신라와 연관된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거지요. 우리는 그것을 읽자마자 압니다. 그러고는 우리 공통의 정서를 느끼는 거지요. 드러내지 않은 슬픔, 그것이 우리의 것임을. 지금도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한 민족의 의식 저변을 흐르는 감정이란 그런 겁니다. 굳이 꺼내어 말하지 않아도 다가오는. 알아차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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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면서 스마트폰에 거의 의지하는 삶이라고 해도. 지금 무너져내릴 것 같아도 언제건 돌아서면 새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DNA 같은 이야기들 덕분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통찰력을 가져다주니까요. 희망을 주기도 하고 용기를 일으키기도 하지요. 내가 뿌리내린 이 땅의 저력을 느끼게 하니까요.
시명상과 「첨성대」
시명상은 시의 언어적, 감성적 요소를 활용하여 마음의 평화와 통찰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아 시를 읽는동안 다양한 감각이 동원됩니다. 읽기 전에 명상을 통해 시각, 청각, 촉각, 후각을 충분히 준비한후에 읽는다면 한결 더 풍성한 감각을 경험할 수 있지요. 배경 지식은 물론이고요. 이러한 감각들은 시를 읽는 동안 더욱 선명하게 이미지를, 소리를, 감촉을 혹은 냄새를 경험하도록 해줍니다. 물론 내가 겪은 경험에서 오는 감각들이지요. 나의 내면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을때 경험할 수 있는 감각들입니다. 내가 몰입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더없이 훌륭합니다만 충분히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좋지요.충분히 경험한다면 시인이 말하는 무언가, 깨달음은 더욱 선명해져 나로 하여금 그 무언가를 알아차리도록 하지요.
시명상은 집중 명상이지만 관찰 명상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시를 읽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마련합니다. 그러고는 마음을 비우지요. 간혹은 무심히 읽은 시의 한 구절에 붙들리지만 그 구절에 붙잡힌 이후에는 온전히 그 시에 주의를 집중하게 되니까요.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그 시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이 왜 이 시를 썼는가보다 시로 인해 내가 얻을 수 있는 통찰을 바라고 있으니까요. 혹자는 감정이라고 할 겁니다. 혹자는 이해라고 할 겁니다.
어떤 것이건 간에 우리는 시인이 말하는 것을 온전히, 판단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붙들린 이후에건, 이 시를 읽겠다는 의도를 세운 이후에건. 그건 시에 대해 어떤 편견이 있다면 좀처럼 몰입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판단은 시를 읽고 난 이후에 내리는 것이지요. 시를 읽기 전이 아니라. 그러므로 시는 시인이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도인 것이지요.
시를 읽어가는 동안 우리는 그 시의 내용에 집중합니다. 단어를 만나면 그 단어의 의미를 헤아리고 구와 절을 잇대고 연을 모아 전체의 의미를 헤아립니다. 간혹 그 의미가 좀처럼 선명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시인은 자신의 깨달음 전달에 실패한 것이고요. 시인들은 가끔 자신이 신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시인들이 뮤즈의 영감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자신이 아닌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자신을 붙잡아 시를 쓰도록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시를 쓰는 동안 시인은 영감에 의해 써나간다고 보아도 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우리는 시 전체를 읽어가면서 그 속에 숨은 영감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는 것이지요.
이렇게 몰입해 읽는 동안 이미지를 떠올리고 리듬을 느끼고 한편으로 감정을 느낍니다. 그런가 하면 단어를 읽자마자 배경지식을 활용해 그 의미를 추론합니다. 배경지식이란 아무래도 기억과 많은 연관이 있지요. 경험이 많은 것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이미지는 단어가, 리듬은 시의 구조가 혹은 단어를 조합하는 방식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 시는 이미지가 아주 선명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읽어 내려가다 보면 첨성대라는 건축물 뿐 아니라 화강암, 대피리, 밤, 우물, 등잔불, 촛불 등의 선연한 이미지가 의식에 떠오르지요. 주변에 소리가 있다 해도 그 소리가 크다 해도 우리의 의식은 시속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으므로 고요합니다. 나와 나의 주위를 잊는 몰입의 시간을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이 시에서 거론하는 일들이, 혹은 사물들이 이미 우리의 뇌리 깊숙이 박혀 있는 설화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시 속에 있는 설화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순전한 직관의 문제입니다. 혹은 통찰력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이 시는 리듬 또한 선명합니다. 우리 고유의 시조 리듬인 3·4조가 선명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마음속에서 가락이 형성됩니다. 내 안의 리듬이지요. 이 리듬은 우리 고유의 리듬, 내용과 형식이 더불어서 의식 깊숙한 곳에서 한국적 정서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끼면서 시를 따라가는 동안 여러 가지 감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별, 대피리, 아기여우, 무덤, 종소리, 잔물결 소리, 첨성대 창문턱, 우물, 첫날밤, 빚쟁이, 송아지 울음소리. 이런 단어는 설움과 기다림과 슬픔을 빚어냅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래 되었다는 의미이므로 기다림을 말합니다. 별은 기도를 말하지요. 송아지 울음소리는 노골적으로 슬픔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감정들이 단어로 인해 나타나 내 안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읽는 이가 자신의 내면을 관찰할 수 있다면 내가 겪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 그것은 이 시가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 통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