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의 시명상 시간에 읽은 시는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입니다. 언제나처럼 호흡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한 다음 짧은 기공체조를 했습니다. 이어 시각 명상과 청각 명상을 거쳐 시 읽기에 들어갔고 감상을 나눈 다음 이 시의 의의를 되돌아보았습니다. 마지막은 늘 쓰기입니다. 그림그리기로 끝내도 좋지요.
이 시에는 외로움이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12줄의 시에서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7번이나 나오지요. 이 단어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인이 택한 어휘는 아주 쉽고 내용 또한 그러합니다.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말을 하기도 하지요.
수선화에게/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화자는 대뜸 '울지 마라'로 시작합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받지요. 결국 외로워서 우는 사람에게 하는 말인 것이지요. 그러니 외로움은 슬픔의 동반자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사람은 본래 외로운 존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화자가 말하는 외로움은 인간에 그치지 않습니다. 도요새도 외로워하고 새들도 외로워하지요. 이 글의 제재인 수선화도 외로워합니다. 그런가 하면 생명 없는 존재인 산 그림자도 외로워합니다. 심지어는 종소리마저 외로워하는군요.
그건 무엇 때문일까요. 이름을 지닌 모든 것은 외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 용도를 말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용도를 이루려면 누군가 사용하는 이가 있어야 하지요. 소리는 듣는 이가 있어야 하고 꽃은 보는 이가 있어야 하며 새는 동료가 있어야 합니다. 눈길은 걷는 이가 있어야 하고 비는 맞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달리 본다면 우리가 외롭다고 느낄 때 만나는 모든 존재 및 비존재는 외롭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마저 외로워하시니까요. 하느님은 기도하는 이가 있어야 하고 의지하는 이가 있어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일 수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왜 '수선화에게' 라고 제목을 붙였을까요. 수선화는 자연입니다. 자연의 모든 것은 혼자이지요. 그런데 왜 유독 수선화일까요. 수선화는 나르시소스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나르시소스는 물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느라 사냥도, 먹는 일도 잊었습니다. 누군가 옆에 와서 말을 해도 돌아다보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그렇게 살던 그가 죽어 물속을 들여다보는 꽃, 수선화가 되었다고 하지요. 자신이 너무 아름다워 자신에게 반한 남자, 그래서 우리는 이기주의자를 나르시스트라고 말합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지요.
사진 위키피디아
나르시소스가 들여다본 것은 외면의 아름다움이었을 겁니다. 그는 내면을 보지 못했던 겁니다. 내면을 보기 위해서는 지켜보아야 합니다. 관찰해야 하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하지요. 그러나 나르시소스는 다른 이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쏟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우리가 자만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요. 세상을 모르는, 오직 자신만을 아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 그러므로 타인을 바라보지 못하는 이. 그러므로 수선화가 가장 외로운 꽃이라고 생각한 게지요.
그러나 홀로 완벽한 산 그림자가 하루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오듯 수선화도 그러합니다. 혼자 완벽한 모든 것의 속성이 외로움이라면 우리의 일상 또한 외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일, 먹기, 걷기, 공부, 놀기 등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없지요. 간혹 함께 한다면 즐거울 테지만 돌아서면 외로움이 더 진해지겠지요.
그러니 우리의 일상은 내가 나 자신임을 잊는 경우 이외에는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위안을 받는 것은 모두가 외로워서입니다. 하느님도 외로운데 우리 인간들이야 당연히 외롭지요. 모든 것의 속성이 외로움임을 이해한다면 누군가를 기다릴 필요도 누군가에게 기대할 필요도 없지요. 그 사실을 이해한 순간 자유로워집니다. 외로움의 반대편에 위안이 있음을 깨닫게 되지요.
이 길은 내가 홀로 해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림자의 반대편에 빛이 있음을 깨닫는 순간, 문득 모두를 보아버리게 되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지요. 홀로라야 함을 알게 됩니다. 홀로 있어 오롯한 존재는 모두의 일부로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시를 읽고 나서 살아가는 자세를 바꿀 수 있게 된다면 그처럼 좋은 일은 없습니다. 이 시는 수선화를 택해 외로움을 논하지만 결과적으로 읽는 이를 위안합니다. 우리 모두가 외로운 존재라고요. 한편으로 외로운 대로 살아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하지요. 모두가 외로워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면 나 자신으로 있음에 대한 가장 큰 위로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외로움은 아주 유익한 느낌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지요.
그러니 이 시는 쉽지만 마음에 와닿는 시, 신화를 택해 인간의 본성을 논하는 시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