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한강
하루가 끝나면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둔다
저녁이 식기 전에
나는 퇴근을 한다
저녁은 서랍 안에서
식어가고 있지만
나는 퇴근을 한다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고
서랍에 넣어 둔 저녁은
아직도 따뜻하다
나는 퇴근을 한다
저녁이 식기 전에
퇴근을 하면서
저녁을 꺼내어
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
하루의 끝에서
퇴근을 하고
서랍에 넣어 둔 저녁을 꺼내면
하루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나는 퇴근을 한다
퇴근을 하면서
저녁을 꺼내어
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
하루의 끝에서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문학과 지성사 2013
거리에 차들이 줄을 지어 지나갑니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나온 사람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흔들면서 걸어갑니다. 해가 뜨기는 했지만 아주 청명하지는 않은 쌀쌀한 아침입니다. 두툼한 점퍼를 입은 이도 있고모자를 눌러쓴 이도있습니다. 휴대폰을 보면서 걷는 이도 있고 황급히 걷는 이도 있습니다. 이들은 저녁 때면 동일한 경로를 걸어 돌아오겠지요. 지금 저들은 저녁을 어디에 두었을까요?
저녁을 서랍에 넣을 수 있을까요? 하루의 끝이 실제로 있을까요? 이것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의 실재이자 표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휘를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요. 그것은 언어만이 갖고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휘는 표면 이면에 있는 것들을 불러냅니다. 말 이면에 있는 것들을 불러내어 느끼도록 합니다. 직접적인 표현으로 할 때보다 힘이 더욱 강력한 것은 우리에게는 아직도 남은 어휘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어휘가 되지 않은 어휘, 말이 되지 않은 말, 그것은 의식의 저 아래에 있는 것들이고 근본적인 것들입니다.
저녁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서랍에 저녁을 넣는다는 행위도 진짜가 아닙니다. 우리는 상상으로 그 모든 것을 처리합니다. 그렇다면 저녁을 서랍에 넣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녁이 아주 소중해서 잠시 미뤄둔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혹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쉴 수 있는 시간을 잠시 보류한다는 의미로 읽히지요.
그렇다면 기대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지요. 화자는 종일 일터에 매어있는 직장인인 모양입니다. 저녁과 퇴근이라는 단어가 거의 동급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체로 저녁은 어스름이 드는 시간입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을 알리는 때이지요. 어둑어둑해지니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느끼는 시간이고 쉴 곳을 찾아야 한다고 여기는 시간인 겁니다.
퇴근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요.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인간의 생체 리듬은 이 빛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저녁이 되면 쉬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일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여기는 거지요.
저녁을 꺼내 든다는 것은 일을 끝낼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은 이가 마음을 챙기는 모습입니다. 종일 분주했던 하루가 끝나가니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지나간 시간은 가벼워지기 마련입니다. 그 당시에는 천근만근의 무게로 짓눌렀을지라도 그 일이 지나간 저녁은 견딜만하다고 느껴지는 것이지요. 저녁을 꺼내드는 것은 비로소 자신으로 돌아갈 여유를 얻은 이가 스스로를 챙기기는 모습입니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든 간에 그 저녁은 따뜻합니다. 그 저녁에 먹는 한 끼는 일과 중에 먹은 점심과는 달라 안온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저녁이지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양식이 되는 저녁의 모습입니다. 아마 화자는 염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 당신의 일과가 아무리 무거웠더라도 저녁만은 따뜻하기를 바란다고. 저녁에는 쉴 수 있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이 시를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