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나 두물머리를 만난다
두물머리는 양평에 있는 지명입니다. 북한강과 남한강 두 강이 만난다고 해서 두물머리지요. 두 물이 만나 합쳐져 한강이 되어 흐르기 시작하는 그곳의 명칭이 바로 두물머리입니다. 반원형을 하고 있는 두물머리에는 강을 향한 고사목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두물머리에는 세미원이라는 곳이 있어 연꽃을 심어놓았습니다.
시를 읽는 순간 대번 예전의 한 때로 돌아갔습니다. 산그늘이 내린 북한강 철교 위에 서 있던 그 소슬한 날, 저녁. 여섯 시였지요. 수종사에서 저녁 종소리가 내려왔습니다. 절은 산 위에 있어 보이지 않아도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서 있었지요. 두물머리에서도 들릴 겁니다. 이 시는 그곳의 정경을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종소리는 아침과 저녁에 들립니다. 새벽 예불과 저녁 예불을 알리는 것이지요.
이 시는 그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의 모습도 묘사하고 있지요.
해 질 무렵
양평 두물머리 강가에
다다른 진흙소가
강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강을 건너간다
나는
고요히
연꽃 한 송이를 들고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진흙소를 따라
당신에게 가는
강을 건너 간다
수종사 저녁 종소리가
들린다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문학과 지성사 2017
해 질 무렵 진흙소가 강가에 다다릅니다. 그 진흙소는 누구일까요. 어쩌면 우리 자신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아마도 우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또 다른 자아지요. 이 세상 삶을 살아낸 우리는 더러움으로 가득합니다. 십우도에서 보이는 검은 소라고 하면 될런지요. 검은 소는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한 더러워진 소입니다. 희망이 있는 것은 연꽃은 진흙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꽃인 연꽃이 더러운 진흙에서 자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절망이 있어야 희망이 있듯, 더러움이 있어야 고귀함도 있습니다.
희망과 절망이 양극이듯 더러움과 고귀함도 양극입니다.
강 건너편을 바라보던 진흙소가 울음을 토해냅니다. 그러고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지요. 그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요. 소를 바라보던 나는 연꽃 한 송이를 들고 진흙소를 따라갑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이지요. 피안으로 건너가는 길입니다. 그 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천국일지 지옥일지 그러나 연꽃을 든 나는 그 길이 정화되는 길임을 압니다. 나는 물속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지요. 물은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물은 정화의 상징인 것이지요.
종소리가 들립니다. 이 종소리는 무엇일까요. 종소리는 어떤 알림이자 경고입니다. 이 종소리는 저 아득한 피안에서 당신에게 여기에 천국이 극락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당신이 정화되고 있다는 의미 아닐까요. 혹은 늘 기억하라는 의미이기도 할테지요.
그 내가 피안에 다다르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까요.
우리는 매일 두물머리를 만납니다. 어제와 오늘이라는 두물머리, 삶과 죽음이라는 두물머리, 사랑과 증오라는 두물머리, 상처와 성숙이라는 두물머리, 내 안에서 종소리가 울릴 때 나의 진흙은 남김없이 흩어져 망각의 근원이 되고 부활의 재료가 되며 성숙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은 어느 자리인지요. 지금 두물머리 이편에 서서 저곳을 바라보고 있는 중인지요. 종소리의 파문이 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말을 할 때, 시를 읽을 때 그 이미지는 내 안에서 형상화합니다. 단어는 내 안으로 들어와 단숨에 나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지요. 보이지 않는 감정이라고 해도 느껴지지 않은 감촉이라고 해도 단어는 상상을 통해 감정을, 감각을 구현합니다. 신과의 접촉이라 할지라도 그 음성을 내 안에서 울리도록 만듭니다. 내가 그 소리를 간직한다면 나의 오염은 순화되고 나의 마음은 부드러워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언어는 우리가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한편으로 영성에 이르게 하지요. 비록 신성하거나 거룩한 어휘는 없지만 이시는 우리를 영적 세계에 이르게 하기에 부족함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