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강선 Oct 18. 2024

어떤 만남: '그래도'의 주민들

‘그래도’의 주민들

 

여름 기운이 아직 남았나 봅니다. 버스에서 내려 명륜당에 들어설 때 더웠으니까요. 춥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머플러를 챙겨왔지만 굳이 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이십여 분이나 늦었습니다. 이상도 하지요. 혹시 상대가 가버리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휴대전화를 놓고 왔으니까요. 지하철을 타고 나서야 그걸 깨달았으니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휴대전화를 놓고 온 것이 결코 손해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덕분에 책을 거의 반이나 읽을 수 있었지요. 결코 쉽지 않은 책이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라 읽는 속도가 빨랐던 것이지요. 

 

명륜당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결혼식 하객들인듯한 사람들이 먼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관광객들, 졸업 앨범용 사진을 찍는 학생들. 그녀는 건물 안에 조그맣게 웅크리고 앉아있어서 눈에 뜨이지 않았습니다. 그녀임을 알아차렸다기보다는 짐작으로 그녀인가 보다 생각했지요. 그건 분위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 그 사람 특유의 아우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요. 저쪽에서 그녀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마스크를 내렸습니다. 급한 걸음으로 다가갔지요. 명륜당 건물로. 

 

우리가 안 것이 얼마나 되었으려나요. 제가 찾아본 것이 7년입니다. 아마 더 오래되었을 것 같습니다만. 우리는 블로그 친구입니다. 엄마 이야기를 적은 글에 그녀가 댓글을 남겼거든요. 그녀의 성격상 지켜보다가 어느 날 문득 글을 적었겠지요. 저나 그녀나 소심쟁이니까요. 

 

앉자마자 우리는 속에 이야기를 쏟아내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보자마자 속내를 말할 수 있다는 것, 오랜 세월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끙끙거리며 지나왔던 세월, 그녀는 그녀의 세계에서 나는 나의 세계에서. 

 

평범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답게 놀라운 삶을 삽니다. 7년 전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이제 백세 가까운 아버지를 돌보며 그녀는 내 표현에 항의했습니다. 아버지를 돌본다는 표현은 가당치도 않다는 것이었어요. 사실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기대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아버지가 어린아이 같으시기에 그녀의 스케줄은 아버지에게 매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보기에 온전히 아버지에게 바치는 세월 같은데. 그런데 아버지가 없으면 자신이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표현 속에 담긴 엄청난 세월을 보았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을 보았고 깊은 사고를 보았습니다. 자신도 성치 않은데, 

 

의사들이 한창 파업을 하던 때 그녀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30여 년 전에는 척추수술을 받았고 이번에는 암 수술을 받았지요. 찾아가려 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상황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지요. 듣고 보니 그럴 법했습니다. 입원하기 전에 아버지가 드실 것을 마련해 놓느라 종종걸음 쳤지요. 남들은 쉽게 고단한 삶이라고 하겠지요. 아버지 이전에는 어머니였으니 너 자신의 삶은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요. 타인으로부터의 인정과 성공을 갈구하는 이들이 보기에 자신은 누구보다도 소중하니까요.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 행태로 나타납니다. 그녀는 ‘그래도’라는 섬을 찾았고 그 섬에서 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는 김승희 시인의 시입니다. 제가 그 시를 다루었을 때 그녀는 유독 긴 답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가 길어졌지요.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



김승희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의 일부

 

화자가 노래하는 ‘그래도’는 착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섬이지요. 그래도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섬이기도 합니다. 그래도는 사랑으로 구성된 섬, 그래서 이 세상이 그나마 살만한 곳이 되는 근간이 되는 섬입니다. 이 착한 시가 그녀에게 가닿았던 것은 자신의 삶이 투영되어서 일 겁니다. 중환자실에 누웠지만 '그래도', 서럽지만 '그래도', 아프지만 '그래도'. 

 

세상에 있지 않은 공간, ‘그래도’로 인해서 우리는 무한한 위로를 받습니다. 시는 상상력을 발휘해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 닿는 이들에게 위로의 손을 내밀지요. 우리가 시에서 감동을 받거나 위로를 받는 것은 나 자신의 경험을 투영할 때입니다. 화자의 말에 집중하다 보면 그 의미가 더 깊게 와닿으면서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리는데 그것이 공명이지요.

 

제가 ‘그래도’에서 위안을 받았듯이 그녀도 ‘그래도’에서 위안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의 주민이었던 셈입니다. 

 

그녀는 제 글은 세 번씩 읽는다고 했습니다.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는 의미겠지요. 그러고는 도움에 감사하다고 선물을 주었습니다. 두툼한 거즈로 만든 무릎 담요와 스와로브스키 팔찌였습니다. 제가 그런 건 하지 않을 것 같았답니다. 팔찌, 목걸이, 귀걸이, 이런 걸 하고 다니는 걸 보지 못했다는군요. 음. 목걸이는 합니다. 하지만 옷 속에 감추어져 있지요. 세심한 그녀의 면모가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요? 제가 썼던 글이 그녀에게 영향을 준다는 의미였지요. 저는 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혹은 제가 받았거나 느낀 감명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지금도 쓰고 있지요. 그렇게 하면 생각이 분명해집니다. 자신을 알게 되기도 하지요. 앎은 곧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앎은 곧 치유의 시작이기도 하지요. 그 글을 읽고 그녀도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니 자신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일 겁니다. 그것은 파동입니다. 시인의 에너지가 글로 표현되고 그 글에서 그 에너지를 감지하고 나의 에너지를 글로 내놓으면 다른 이가 읽고 또다시 영향을 받으니까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명륜당 뜰은 고즈넉해졌고 이제는 마당을 질러가는 사람 두엇이외에는 눈에 뜨이지 않았습니다. 쌀쌀해지기도 했고요. 일어섰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저녁 식사를 챙겨야 했고 저는 수업을 하러 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래도'에 살고 있으니 매번 만나겠지요. 각자 파동을 보내어 서로의 삶을 확인하고 또 기운을 주고 위안을 주겠지요. 그것이 더불어 사는 삶이니까요.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 온 목적이니까요. 선한 영향을 끼치는 그 일이. 저는 계속해서 치명상을 하고 그 느낌을 적을 것이고 그녀는 지금처럼 살아갈 겁니다.  

작가의 이전글 시명상/상처/루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