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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선 Nov 05. 2024

시명상/파란 돌/한강


파란 돌 / 한강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을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파란 돌」은 삶을 넘어선 영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화자는 십 년 전 꿈속에서의 죽음을 말합니다. 죽은 화자는 가벼웠고 환했고 무게가 없었지요. 화자는 그 꿈속에서 시내를 보았고 그 시내 속에서 파란 돌을 보았다는 것이지요. 


그 시내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생명이 흐르는 시내인지 모두의 운명이 놓인 시내인지,  혹은 나를 비추어주는 거울인지. 분명한 것은 시냇물 속의 그 파란 돌을 줍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지요. 돌에는 무게가 있습니다. 그러니 줍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합니다. 깃털처럼 가볍다면 주울 수 없는 것이지요. 


줍는다는 것은 동작입니다. 행위는 피와 살이 있는 육체가 있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줍는다는 행위는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죽음 속에서 무언가 줍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니까요. 죽음에는 그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줍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지요. 


줍기 위해서는 갖고 싶다는 감정이 필요하고 그 감정을 실어 나를 따뜻한 육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화자는 깨닫습니다.  죽음과 꿈속에서 존재하는 '파란 돌'을 줍기 위해 혹은 갖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것을 깨닫고 눈을 뜨니 따뜻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따뜻함은 살아 있음의 표상입니다.


여기까지가 절반입니다. 꿈과 현실이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십 년이 흘렀습니다. 화자는 의아해합니다. 그 십 년간 혹시 파란 돌을 주운 적 있을까요? 혹은 놓치기도 했을까요? 아니면 주웠는데 영영 잃어버렸을까요? 혹은 그 그림자가 어른거릴까요? 


파란 돌은 무엇일까요.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존재하는 그 파란 돌은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일 수도, 사명일 수도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내 일상에서 어른거리는 '파란 돌'을 알아차리면 순간들이 충만하겠지요. 



* 11월에 한강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를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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