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에, 5살 손녀는 싼타할아버지를 대접 하기위해 빵과 우유 한잔을 머리맡에 놓이두고 잠자리에 든다. 손녀가 잠이들면 우유는 비운다.. 아침에 선물과 빈잔을 본 손녀는 좋아서 어쩔줄 몰라한다. 할아버지가 빵은 않드시고 우유만 드셨다고. 제가 놓아둔 우유를 마셨다고 흥분하며 펄쩍뛴다. 그렇게 천진난만하던 손녀는 어느새 예쁜 숙녀가 되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성도들의 마음과 싼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고대하는 아이들의 소망, 연인들의 사랑과 행복이 어우러지는 명절이다.
크리스마스도 세월따라 변해간다.
내학창시절의 크리스마스는 따듯한 추억속에 있다. 11월 말부터 크리스마스 츄리와 장식품, 크리스마스카드로 거리의 분위기가 익어가고 여기저기서 캐럴이 들려왔다. 요즘같으면 소음규제 운운하며 거리에서 캐럴을 듣는건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때는 으레 그러려니 하며 겨울이면 찿아오는 축제일로 여겼다.
저마다 친구와 고마운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과 덕담을담아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을 보냈다. 장갑이나 만년필등 선물도 예쁘게 포장해서 주고받았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많이 받으면 행운도 따라온듯 뿌듯했다. 택배로 선물을 주고받고 언제 어디서나 유튜브를 통해 듣고싶은 음악을 들으며, 카톡으로 안부를 묻고 인사를 하는 요즘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통금시간이 있던 그시절, 크리스마스 전야에는 통금이 해제 되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취하고 해방감을 만끽하며 밤새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학생때 내가살던 동네는 서울 서교동 홍익대학교 부근 이었다. 65년도에 제2한강교가 개설되기 전까지 홍대앞 일대는 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는 서울 변두리 였다. 나는 겨울이면 서교호텔(요즘 이름이 바뀐듯) 건너편 논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그때는 지금의 대학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다소 한적한 동네였고 나는 기끔 친구들과 와우산기슭의 홍대캠퍼스로 산책을 가기도 했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성탄절을 위해 성가연습을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찬양예배를 드리고 집사님들이 끓여주시는 떡국을 먹는다. 친구들과 한밤에 먹는 떡국은 마음까지 따듯하게 한다. 파트를 나눠 지도 집사님 인솔하에 새벽송팀이 출발한다. 겨울답지않게 포근하던 어느해 성탄절이 기억에 남는다. 눈이 소복이 쌓이고 하늘은 높았으며 떨어질듯 큰달은 정말 밝았다. 깊은밤에,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을풍경을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낮에 보던 마을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집도 거리도, 모든것이 깊이잠든 고요한 마을풍경이 은은한 달빛에 싸여 동양화를 보는것 같았다.
성도님 집에 도착하여 집사님 싸인에따라 찬송을 부르면 집주인이 나와서 함께 따라 부르고 따끈한 차를 내어 주기도 하고 과자등 선물을 주셨다. 미리 준비해간 자루에 채워진 선물들은 성탄예배 드리러오는 어린이들에게 나눠준다. 구스다운패딩이나 덕다운패딩코트는 없었지만 추운줄 몰랐다. 교회로 돌아와서는 따듯한 커피를 마시고 뒤풀이를 하며 잠을 쫓았다.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나면 정오가 넘는다. 밤새워 집집을 돌며 찬송을 부르고 낮예배까지 드린 우리는 비몽사몽으로 집을 찿아갔다. 집에 도착하면 쩔쩔끓는 아랫목과 쏟아지는 잠이 나를 기절 시킨다. 그렇게 크리마스에는 긴 낮잠을 잤다. 내가 어른이 된후에도 얼마동안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련하게 들려오는 새벽송 소리를 들었다. 거리의 풍경도 여전했다
요즘은 화려하고 거대한 조형물들이 도시 곳곳을 장식하고 소박하고 정겨운 풍경들은 차츰 멀어져 갔다.
흰눈을 밟으며 그림같은 마을을 돌아 새벽의 정적을 깨고 부르던 찬송소리와 늦은밤 친구들과 먹던 떡국의 맛은 기억에 생생한데 친구들의 얼굴이 그려지질 않는다.
달빛아래 단아하고 평화롭던 그마을의 모습은 세월속에 숨어 버리고, 젊음의 활기가 넘치고 번화한 대학가로 거듭났다
학생시절의 나는 Pat Boone의 White Christmas 를 들으며 성탄절을 맞았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속에 흰눈같은 은총이 내리는것 같았다. 올 성탄절에 나는 팻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