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해선 않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

옆방 사람들(1)

by 김영자

마당 넓은 남향집 꽃밭에는 할머니가 심어 놓은 각종 꽃들로 가득했다. 장독대 옆엔 우산모양으로 손질해 놓은 큰 사철나무가 서있고, 대문에서 마당으로 들어서는 양옆으로는 난쟁이 맨드라미 들이 일열로 서서 들고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여름날 대청마루에 누워 동화책을 읽고 있으면 가끔씩 먼 하늘에서 웅~ ~하며 비행기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비행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부모님은 지방으로 이사를 하고 나와 동생은 할머니와 부천 소사리에 살고 있었다.

그때는 6.25전쟁이 끝나고 5-6년정도 지난 후로, 모두의 살림살이가 지금과는 비교 할수 없을 만큼 열악했다.

상수도 시설이 없던 우리 마을에서 우물이 없는 집은 공동우물을 이용했다. 우리집에는 장독대 옆에 펌프가 있었는데 할머니와 동네 아줌마들은 뽐뿌라고 했다. 우리집 근처에 사는 아줌마들은 우리집에서 뽐뿌물을 길어갔다.

우리집에서 식수를 해결하는 아줌마들은 할머니에게 깍듯했으며 더러 집에서 가꾼 농작물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우리집 건너방에는 몇집의 사람들이 세를 살다 갔는데 내가 국민학교 4학년때 영철이네가 이사왔다. 아저씨는 미군 부대에 다닌다고 했다.

아줌마와 4살된 영철이, 아기인 영수와 네식구 였다. 나는 아기를 좋아해서 자주 영수를 만져보고 안아보며 예뻐했다. 아저씨는 가끔 내게 노란 미제 연필을 주셨고 아줌마는 하루종일 영철이와 영수를 돌보며 살림하느라 바빠 보였다.

영수의 돌날 아줌마는 수수팥떡을 만드셨다. 아기들 생일에는 수수팥떡을 해 먹어야 액운을 쫓을수 있다고 했다. 방아간에서 수수를 빻아 오고 붉은 팥을 삶아 팥고물을 만들었다. 동그랗게 빚은 수수경단을 끓는 물에 삶아 팥고물에 굴리니 수수팥떡이 되었다. 아줌마가 떡을 만드는 과정은 신기하고 재미 있었다.

우리가족과 아줌마는 수수팥떡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아줌마는 옷소매를 걷어붙인채 한손으로 영수를 안고 한손으론 수수팥떡을 먹으며 연신 웃었다. 그때는 아줌마가 참 행복해 보였.

어느날 낯선 아주머니가 영철이 보다 조금 큰 사내아이와 영철이 보다 조금 작은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아주머니는 아무말 없이 아이들을 두고 가버렸다. 아줌마의 표정은 매우 어둡고 굳어 보였다. 저녁에 아저씨가 퇴근하고 오자 그날온 두 아이가 아저씨 품에 안겼다.

그 애들은 아저씨의 아들들이라 했다.

아저씨는 고만고만한 네아들의 아버지 였다.

국민학교 4학년이던 나는 그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며칠동안 아저씨와 아줌마는 4명의 사내애들과 함께 지냈다. 아저씨가 술에 취하면 "그래 5부자가 잘해보자." "5부자가 나서면 못할게 뭐가 있겠냐." 라며 큰소리를 쳤고 아줌마와 아이들은 아저씨를 쳐다봤다.


어느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으로 들어 서는데 아주머니 몇분이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야 이리나와!" 그들은 큰소리로 거친 말들을 쏟아내며 영철이네 방문을 세차게

열어 젖쳤다. 나는 무서워서 바라만 보고 서 있었는데 갑자기 영수를 물건 던지듯 내게 던졌다. 너무 놀란 나는 얼결에 아기를 받아 안았고 안방에서 할머니도 뛰어 나오시며 "이게 무슨 일이요?"하고 물었으나 그 아주머니들은 대꾸도 않고 성난 사자처럼 고함을 지르며

영철이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발로 걷어차며 살림들을 마당으로 마구 내던다.

전에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갔던 아주머니가 친구들을 데리고 온것이다.

아이들은 자지러질듯 울었다. 어느새 우리집 담벼락엔 많은 사람들이 붙어서서 마당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온마을 사람이 모두 몰려온듯 했다. 마당에는 옷이며 살림들이 내동댕이 쳐지고 부엌살림들도 쨍그렁 소리를 내며 마당에서 깨졌다. 김치며 고추장단지, 된장단지와 양념들이 깨진 사기그릇의 사금파리와 뒤범벅이되어 마당은 순식간에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흥분한 아주머니들은

실성한 무당이 춤을 추듯 마구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내던지고, 너무도 무섭고 놀라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담벼락에 기대어 구경하는 사람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담이 어느순간 맥없이 마당을 향해 무너졌다. 잠시 놀라 물러섰던 사람들은 이내 무너진 담위에 올라서서 구경을 했다. 깨진그릇과 음식이 엉겨붙어 냄새가 진동하고 그위로 던져진 물건들이 쌓인데다 담까지 마당으로 무너지는 바람에 집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할머니가 "왜 남의 집에 와서 이러느냐"고

따져봤으나 막무가내로 이어지는 광란의 시간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저녁이 되자 아주머니 일행은 두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갔다.

아줌마는 영수를 안고 하염없이 울었고 영철이는 울지도 못하고 겁에 질린채 서 있었다.

할머니는 "이게 무슨 일이고" 하면서 마당에 쌓인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아줌마는 계속 울기만 했고 우리가족도 폐가같은 마당을 바라보며 얼이 빠진 상태였다. 어두울때쯤 아저씨가 오셨다. 하루종일 점심도 저녁도 굶은채 머리채를 잡히고 발로 채이며 매를 맞은 아줌마는 아저씨를 보자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아줌마를 다독이며 어쩔줄을 몰라 했다. 한참을 쩔쩔매며 갈피를 못잡던 아저씨는 우리부엌으로 가시더니 잔치국수를 만드셨다. 그경황에 그렇게 빨리 맛있는 국수를 만들어 내는 아저씨의 솜씨는 노련하고도 익숙한 기술자 같았다. 우리가족은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너무도 놀란 하루였으나 아저씨의 국수는 정말 맛이 있었다. 아저씨는 울기만하는 아줌마에게 억지로 권하여 국수를 먹게했다. 울면서 젓가락으로 국수발을 들어 올리는 아줌마의 모습이 너무 가여웠다.


다음날 새벽 일찍 영철이네 가족이 모두 집을 나섰다. 저녁에 아저씨만 오셨는데 이사갈 집을 마련 할때까지 아줌마와 아이들은 아저씨 친구집에 있기로 했단다. 그날부터 이사 갈때까지 아저씨 혼자 와서 잠만 자고 가셨다. 그후로 나는 귀여운 영수도 영철이도 아줌마도 볼 수 없었다. 밤늦게 술에취해 들어오시는 아저씨는 그때 유행하던 "꿈속의 사랑"을 부르고 또 불렀다. "사랑해선 않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말 못하는 이가슴은 이밤도~ ~". 아저씨가 빈방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면 할머니는 "께낀(더럽다의 평안도 사투리)하게 논다" 라고 하시며 혀를 찼다.

지금 같으면 있을수 없는 일이 그때 우리집에서 일어났다.

사정이야 어떻든 왜 남의 집에 피해를 입히고 온통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가는지 어린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경찰에 신고 한다는건 생각조차 못하실 분이고 설령 그런생각을 했다한들 전화도 없던 시절이며 직접 파출소를 찿아간다해도 한시간도 더걸릴 것이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절대로 일어날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사과 하지 않았고 피해를 보상 하지도 않았다. 며칠에 걸쳐 할머니가 엉망이된 마당의 쓰레기를 치우고 정리 하셨다.

무너진 담도 할머니가 자재를 구입하고 교회 청년봉사대 대학생들이 수고를 해서 복구했다.

지금도 가끔 "꿈속의 사랑"을 듣게되면 영철이네 가족이 생각난다. 두 아줌마들은 어찌 되었는지 , 아저씨의 네 아들들은 잘 자랐을지, 무책임한 아저씨는 어떻게 사셨는지,안타까운 영철이네 가족 이었다.

사랑해선 않될 사람을 사랑해서,여러 사람이 불행 해지는걸 보여준 영철이네 가족사다.

사랑해도 좋을 사람을 사랑 하는 것이 모두가 행복한 일인것을 알게준 마음아픈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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