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황교장은 점심나절에 빵과 우유로 요기를한후 쌍화탕을 마시고 누웠다. 아련한듯, 몽롱한듯 꿈을꾸다 눈을뜨니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속옷을 갈아 입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옷걸이에 걸어 문고리에 걸어둔 속옷이 청승맞아 보였다. 방안에서 말린 속옷은 마음마저 눅눅하게 했다. .그옛날 어머니가 갈아입을 속옷을 건네주시던 생각이 났다.. 상쾌하고 보송하던 그 촉감이 아련하다. 고향집 넓은마당에는 긴 빨래줄이 있었고 어머니는 가족들의 옷을 빨아 널고 바지랑대를 높이 세워 시원한 바람에 옷들이 뽀송하게 마르도록 하셨다. 홑이불이라도 빨아 말리는날엔 마당 한가운데 높은곳에서 하얀 홑이불이 깃발처럼 펄럭였으며 그것은 가정의 안녕을 지키는 깃발 같았다. 꿉꿉한 속옷을 갈아입은 황교장은 벗은속옷을 세면대에서 주물러 꼭짠후 옷걸이에 걸었다
아내의 장례식을 마치고 말레이시아로 돌아갔던 아들은 한달후쯤 다시 항교장을 찿아왔다. 아버지가 혼자 계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되고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고 했다. 어차피 함께 살야야 할것이니 이참에 같이 말레이시아로 가자고 했다. 잠시 망설여졌으나 아들이 대견하고 믿음직 해보여 아들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서둘러 서울집을 팔고 황교장은 아들을 따라 말레이시아로 갔다. 아들이 사업을 확장하고 싶어했음으로 서울집 판돈을 아들과 딸에게 나누어 주었다. 황교장은 통장의 현금과 연금이있어 금전적으로 걱정할 일은 없을것 같았다. 말레이시아로 간 후에도 아들과 딸은 황교장 에게 극진했다. 다만 그들의 사고 방식과 생활습관이 낯설었다. 딸은 특별한 음식을 하게되면 출근길에 들러 두고갔다. 가끔 전화를 해서 불편한건 없는지 건강은 어떤지를 묻기도 했다. 딸과의 대화는 항상 의사와 면담하듯 짧게 끝났다. 바쁜중에, 전화로 나누는 대화에 느긋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끄집어 낼수도 없었고 걱정할만한 말은 더구나 할수 없었다. 며느리도 출퇴근때마다 예의바르고 자상했다. 손자들도 귀여웠으나 그들은 항상 바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영어 배우러 가랴 피아노학원가랴 할아버지와 여유있게 보낼 시간은 없었다. 아침에 가족들이 나가면 10시에 인도네시아인 가사도우미가 온다. "슬라맛 빠기!" 인도네시아 어로 아침 인사를하며 들어서는 도우미는 영어를 전혀 못하므로 황교장과 한마디의 대화도 나눌수 없었다. 서로 자신들의 언어로 말을 하고 대충 눈치로 알아듣는 상황이었다.
청소와 빨래를 마치면 도우미는 황교장의 점심을 차려놓고 갔다.
표면상 불편 할것 없어 보였지만 황교장은 항상 가슴이 답답했다. 친구도, 이웃 지기도 없었다. 저녁이면 가족들과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의 시간도 없다. 며느리는 저녁쯤 들어와 아이들과 황교장의 저녁을 챙기고 아들은 밤에 들어왔다. 저녁시간에나 아들이 들어오는 밤시간에도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삼갔다. 누가 뭐라는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어갔다. 아내와 함께 있을땐 별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핀잔을 들으면서도 흰소리도 하고 신소리도 했으며 싱거운 소릴하며 서로의 마음도 알고 고운정 도 미운정도 쌓아갔다. 마음이 답답한때도 없었으며 거리낄일도 없었다. 황교장은 언제나 화통한 사람이었다. 살기좋은 내나라두고 왜하필 남의나라에서 터를 잡느냐고, 아내가 서운함을 드러낼때도 "시대가 달라졌어. 아이들도 생각이 있을테니
믿고 응원해 주자고" 라며 아내를 달랬었는데, 화통하던 황교장은 간곳없고 소심한 할아버지가 되어갔다.
사계절 에어컨을 켜고 살아야 하는 날씨임에도 가끔 무릎이 시리고 뱃속이 추웠다.
그럴때면 서울생각이 간절했다. 모든 문제는 서울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것만 같았다. 한의원 에서 따듯한 찜질을 하고 물리치료를 받던 생각이 났다. 지인들이나 아내와함께 찜질방을 찿던 시간도 그리웠다.
한참을 이생각 저생각에 잠겨있을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준구씨였다. 교장선생님이 쌍화탕을 사갖고 들어가시더라고, 종업원이 말하더란다. "어디 불편하세요?" 준구씨가 물었다. ".고뿔이 찾아오려나 봅니다. 허허" 황교장은 대수롭지 않다는듯 대답했다. "요새 감기 지독합니다. 잘드시고 푹 쉬셔야 해요. 열은 없어요? 기침은요?" 준구씨는 증상을 자세히 묻고 내려갔다. 얼마후 쟁반에 삼계탕을 바쳐들고 준구씨가 다시 올라왔다.
길건너 삼계탕집에서 배달을 시킨것 같았다.
"따듯할때 식사를 하시고, 이약을 드세요. 푹주무시고 나면 내일아침에 힘이 날겁니다." 준구씨가 나기자 황교장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주위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고 있는듯한 기분이 들어 서글펐다.
어쨋거나 준구씨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입맛은 업었지만 애써 삼계탕그릇을 비웠다. 약도 먹었다. 하루속히 기운을 차려야 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