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것은 마음이 남긴 흔적들이다
최근 들어 피부에 확 와닿게 느껴지는 사실은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지쳐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이를 먹을수록 믿는 일이 점점 적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빨이 점점 닳아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저것 별로 참된 것도 없고, 가치 있는 일도 없다는 투로 시니컬하게 되어가는 것도 아니고, 회의적으로 되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마모되어 가는 것이지요.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삶이란 헝클어진 번민의 실타래 속에서 늘 애처롭게 과거만을 부둥켜안으며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그리움 속에 자신을 의탁하며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그리운 것은 항상 추억의 끝에 서있고 긴 시간을 지낸 후에 바라보면 세상은 언제나 얼룩투성이의 낙서로 남아있지만, 추억의 뒷그늘에서 풀려나오는 무채색의 화면들을 떠올리면서 다시 한번 힘겨운 현실의 파고를 넘어야겠다는 의지를 다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삶에서 보이는 이런 선명한 역설은 인간이 꼭 가져야 할 불가결한 요소이겠지요.
이렇게 삶이 우리에게 주는 모순은 삶의 단편들을 몸속으로 빨아들이고 세포 하나하나를 기름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고 지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불명확하게 되는 것.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경계선이 불분명하게 되는 것이지요.
자기에 대한 연민, 타인에 대한 분노, 타인에 대한 연민, 자기에 대한 분노, 그러한 것들의 경계선이 불분명하게 되어 결국 감정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모르게 되면서 마음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은 아주 모호한 일이지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마도 어딘가에서 초점이 어긋나서 진짜의 나는 현실의 내가 아니게 되고 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가지 색을 칠한 팽이를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회전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구분이 불명확해져서 결국에는 혼돈에 이르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시간이 서서히 걸음을 멈추기 시작하게 되며 그 시간과 공간의 뒤틀림 속에 정신과 육체가 꼼짝없이 결박당한 채 극심한 아픔에 시달리게 되면서 삶을 현명하게 바라보는 시야를 잃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누군가의 거대한 손이 하나하나의 물건에서 고유의 이름이나 개성을 꼼꼼하게 뜯어낸 것처럼. 지쳐감에 따라 뒤에 남게 되는 것은 각각의 시대가 필연적으로 빚어낸 이름 없는 앙금 같은 것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시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대단한 공포심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것은 심한 경우에는 판단 기준이라든가 혹은 자존심이나 용기 같은 것마저도 앗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달성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달성하려고 할 때에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의 세 가지를 파악합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일을 해냈는가? 지금 자신은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 이제부터는 어느 정도의 일을 하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박탈당하고 나면 뒤에는 공포와 불신과 피로감밖에는 남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쌓아 올린 자신의 삶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차가운 침묵 속에서 존재하는 그 허무와 허탈함이 생명의 에너지를 갉아먹고 삶을 지치게 만듭니다.
반추해 보면 마음이란 것은 또는 감정이란 것은 현실에서는 척력과도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현실에서 그 마음을 밀어내려고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후회라는 것을 하나 봅니다. 당시에는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이 훨씬 지나고 나서야 이해할 때가 많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대개의 경우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한이라는 수렁에 빠집니다.
그리고 꽤 긴 시간 허우적댈 수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우리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더더구나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먼저 행동을 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마음이라는 것은 무척 불안하고 불완전합니다.
조그만 세계 안에 갇혀 갈 곳을 잃어버린 한쌍의 조각 같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로 다행인 것은 마음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흔적을 다시 더듬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의 흔적을 더듬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흔적을 끊임없이 더듬게 되면 결국 내가 속한 세상과 나 자신에게 닿게 됩니다.
그리고 수은처럼 정지한 어둠 속의 시공간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마음이라는 것은 나와 세상을 연결해 주는 고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없다면 우리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쳐간다는 것을 느낄 때 혹은 지쳐서 초라하게 쓰러졌을 때에 현실의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마음과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끊임없이 그 흔적들을 더듬어봐야 합니다.
고요한 오랜 시간의 기억과 마음이 남긴 흔적들을 더듬어보고 그 자국들을 끊임없이 따라가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 그 길을 따라 세상과 닿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칠흑같이 어둡고 아득히 멀게만 보이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광활한 터널을 뚫고 찬란하게 부서지는 장밋빛 광채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지쳐있다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세월이라는 표랑 속에서 자신이 남긴 마음의 흔적을 천천히 어루만져 보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를 살포시 안아주듯이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