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질식하는 시간

마비의 감각들

by 보림월

식탁 위에는 낯익은 편지봉투가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편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방안의 모든 것은 움직임을 멈춘 채 그 구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편지는 시공간과 괴리감이 들 정도로 현실의 무게가 결락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A가 미처 거둬가지 못하고 남긴 마지막 숨결만이 침묵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A는 편지 쓰는 걸 좋아했다. 자신은 늘 누군가와 헤어질 때 편지를 남기고 떠난다고 이야기했던 게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는 식탁으로 다가가 현실의 무게가 없는 편지를 조용히 뜯어서 읽기 시작했고 그 사이 이별의 전조는 방 안의 공기를 묵직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 만나도 앞 날이 없으니까."

A가 활자 뒤에 숨어서 속삭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언어의 의미는 정당했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앞날은 커녕 뿌리라 할 것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이별의 사유를. 헤어짐의 이유를 알고 싶은 건 대상이 나를 철저하게 짓밟기를 원하는 나의 삐뚤어진 욕망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해야 미련 따위가 나를 결박하지 않을 거라는 걸 믿었기 때문에. 결국 각자의 이기심이 척력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A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모르는 편이 더 좋은 일도 있어," 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듣지 않는 편이 더 좋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듣지 않고 버틸 수는 없다. 때가 오면 아무리 단단히 귀를 틀어막아도 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키며 사람의 마음을 파고든다. 그것을 막기란 불가능하다. 그게 싫다면 진공의 세계로 가는 수밖에 없다.


결국 이별의 사유는 호두 껍데기처럼 단단한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고, 내 악력으로 껍데기를 깨기는 불가능했다.

편지봉투를 내내 멍하게 보고 있자니, 몇 년에 걸친 관계라는 무게가 그 봉투에 고스란히 구겨넣어진 듯 했다.

그만큼의 시간, 갖가지 기억과 갖가지 감정이 베어 있는 시간이 평범한 편지봉투 속에서 질식한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A는 말했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은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얼마든지 붙고 떨어질 수 있는 거야. 마음이 가는 길은 관습이나 상식이나 법률로는 규제할 수 없는 거니까. 지극히 유동적인 거잖아. 그건 자유롭게 날갯짓하며 이동하는 거야. 철새에게 국경의 개념이 없는 것처럼."

자유롭게 떠나고 싶다는 A의 말은 실이 끊어진 풍선처럼 허공으로 떠나는 마음을 나에게 보여주기에 적합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아주 여유롭게 바닷속의 굴처럼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제 와서 억지로 껍데기를 벌려봐도 속은 텅 비었으리라.


편지를 읽고 나니 지금 내가 당하는 일이 지독히 부조리하고 비정한 처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분노는 없었다. 내가 느꼈던 것은 기본적으로 마비의 감각이었다. 누군가를 강렬하게 원하는데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생기는 격렬한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마음이 자동으로 작동시킨 마비의 감각이었다. 비유하자면 정신의 모르핀 같은 것이다. 이별이 남긴 것은 통증조차 느끼지 못할 무감각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체념의 소용돌이로 이끌고 있다. 결국 세월의 질서는 편린이 되고 모든 건 파편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