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앞에선 누구나 변명을 한다.

이별의 말

by 보림월

비가 오는 저녁 A가 말했다. 고요한 물웅덩이에 회색빛 구름이 비치는 것처럼 탁한 눈빛이었다. 그 눈은 타인의 접근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견디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불행이 아니라 권태야. 하지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상을 바꿀 의지 없이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 권태의 장점이지.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해? 그건 그냥 사랑의 본색일 뿐이야."

허공에 메마른 진동을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건조하는 듯했다. 그녀의 입술을 보고 있자니 마치 황량한 사막에 우두커니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이별에 합의를 했다. 감정의 골이 깊은 까닭으로 서로를 힐난하는 행위를 하기에는 너무 어른이 되어있었다. 아마 우리의 감정은 새벽의 정적 속에서 조용히 쌓였던 눈이 시간이 갈수록 녹아버리는 것처럼 침묵 속에서 용해되었을 것이다.

"분명히 사랑해서 만난 건데, 사랑을 이루고 나니 이렇게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어. 너무 아이러니하잖아. 이루지 못한 사랑에는 화려한 비탄이라도 있지만 이미 이루어진 사랑은 이렇게 남루한 일상만을 남긴다는 게."

모든 것은 역설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너무 흔해서 감흥조차 없었던 그 말이 이별 앞에서 세차게 밀려들었다. 그리고 완만한 시간의 경사가 숙명적인 붕괴를 향하여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A와 나 사이에는 여러 겹으로 빈틈없이 쳐진 그물같은 공기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 사이를 뚫으며 A는 말했다.

"이제는 사랑을 원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행복해질지도 몰라. 나나 너나."

차가운 정념 속에서 떠도는 과거를 더듬으며 내가 말했다. "우린 함께 일 때 항상 불행했을지도 몰라. 그치만 나를 불행하게 만든 너라고 해도, 우리가 사랑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거야. 그렇지 않아?"

바람이 불어와 모래 위에 생기는 무늬처럼 A의 눈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우리는 모두 삶에 속는 거야. 근데 굳이 속지 않으려고 애쓸 이유도 없어. 모든 건 변하고 사라지고 배신하니까. 얄팍하고 유한한 앎을 가지고 무한한 삶을 어떻게 알겠어. 알려고 하면 할수록 위태로워질 뿐이지."

A의 목소리의 울림 그 한가운데에는 돌처럼 딱딱한 미움의 씨앗이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A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는 그녀를 대체하는 이미지와 기호만 명멸했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내 질문은 대답을 듣지 못한 채 한동안 공중을 떠돌았다. 그녀가 남기고 간 공백 속에서 나의 모든 언어는 힘을 상실하고 유리 창문에 매달린 빗방울처럼 현실의 영역으로부터 서서히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비오는 밤 이별의 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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