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인이 내 삶에 개입되는 것 못지않게 내가 타인의 삶에 개입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편견을 품게 되었다는 뜻일 터인데 나로서는 내게 편견을 품고 있는 사람의 기대에 따른다는 것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할 일이란 그가 나와 어떻게 다른지를 되도록 빨리 알고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그것이 내가 삶에서 유일하게 희구하는 단조로움이었다.
몇 달 전 친구의 전 연인이었던 C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녀의 존재감을 빨리 알아채지 못했다. 목소리도 낯설었거니와 무엇보다 내게 전화를 걸어올 여자로서 그녀의 존재가 머릿속에 입력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난데없이 나에게 산부인과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전화기만 들고 있었다. 입술은 봉인된 것처럼 무겁게 닫혀 있고, 말은 깊은 시간의 웅덩이에서 잠들어 침묵만이 흘렀다.
오직 시간이 느슨해지는 것 같은 적막감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냉소를 쏟아부은 말투로 알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나는 누가 나를 반기는 것은 질색이다. 그 반가움에 값할 일이 귀찮고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차라리 실망시키는 쪽을 택하곤 하는데, 그녀에게 내뱉은 말 역시 조악하고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만난 그녀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 근데 네가 곁에 있어줬으면 하고."
"무슨 말이야?"
"난 수술이 무서워."
"무서워서 날 찾았다는 거야?"
나는 이미 병원에 들어선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아플까 봐 무서워하는 게 아니야. 난... 깨어나는 일이 무서워."
그녀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 느낌 알아? 어디선가 아련하게 소리가 들려. 기계소리, 발소리, 문소리, 사람의 목소리... 그중에 어떤 한 소리를 듣고는 깜빡 의식이 돌아오는 거야. 그때 정말 무서워. 꼭 아주 낯선 세상에 막 태어난 순간 같아. 생각해 봐. 얼마나 두렵겠어. 아주 낯선 세상이란 말이야. 아직 완전히 마취가 안 풀려서 온몸이 꽁꽁 묶인 것같이 꼼짝할 수가 없는데 간호사들은 그 낯선 세상에 어울리는 아주 낯설고 무심한 목소리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며 점심메뉴를 정하고 있어. 미치도록 아파도 좋으니 빨리 마취에서 깨어나게 해달라고 외치고 싶은데, 나 혼자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 거야. 왜 있잖아. 악몽이나 가위눌렸을 때 빨리 깨어나려고 발버둥 치는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때, 그런 때 같아. 사실은..."
애써 말을 이으려고 하는 그녀의 음성은 지나치게 떨려 나왔다.
"아침에도 그래. 아침마다 깨어나는 순간이 무서워."
그러더니 어린아이처럼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누군가 곁에 있었으면 하는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수술실로 향했다. 그녀가 수술이 끝난 걸 확인한 뒤 다시 안 볼 사이처럼 인사도 하지 않고 병원을 나왔다.
얼마 뒤 지인의 일로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관계였기에 그녀를 본 순간 짜증이 났다. 하지만 충분한 짜증이 섞인 내 목소리에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명랑했다. 오히려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그녀를 더욱 즐겁게 하기라도 한 듯 그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말야."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검은 눈은 점점 벌어지고 있었고 입가에는 파문이 번지듯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 왜 하필 너한테 산부인과에 같이 가자고 말한 줄 알아?"
"왜 그랬는데?"
"네가 친절한 사람 같지 않아서야."
나를 둘러싼 공기가 까끌까끌한 입자로 변해서 살갗을 긁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절당해도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았어."
나의 언어는 침묵의 먼지와 동화되어 자꾸만 가라앉았고 마침내 그 적요는 나의 언어를 비웃으며 그녀에게 결코 닿지 않을 깊은 수렁 속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병원에 따라가 준다 해도 너라면 신세 진 느낌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지. 남의 비밀을 안 뒤에 갖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정 같은 것, 그런 걸 나눠주지 않을 만큼 차갑게 보였으니까."
가슴속에 단단한 공기 덩어리 같은 것이 느껴졌다. 마치 비구름을 그대로 삼켜버린 것처럼.
"난 네가 좋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냉정함 같은 거. 그게 너무 편해. 너하고는 뭐가 잘못되더라도 어쩐지 내 잘못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그녀의 말에 나는 아연해졌다. 그녀의 언어를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하는 입술을 보고 있자니 몇억 년 전의 암석 속에서 발견된 연체동물의 화석처럼 이미 사라져 버린 삶의 어렴풋한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나의 냉소를 빌려 고통에서 벗어난 뒤였다. 상처를 가장 빨리 치료하는 방법은 자생력을 믿는 것보다 타인의 손을 빌리는 것이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단조로운 내 삶에서 가끔 나는 두려워진다. 나라는 인간을 거쳐간 모든 인연들. 심지어 모든 새벽과 모든 석양이 나를 한 조각씩 한 조각씩 빼앗아갈 것 같다. 그러는 사이 나라는 존재는 흐름에 모두 깎여나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될 것 같다. 세상에 결코 변하지 않는 진실 중 하나는 사물은 수정처럼 투명하고 아주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단조로움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