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유난히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가느다란 턱을 추켜올린 채 회색 허공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A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볼 때면 살갗에 존재하는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열려서 그 안으로 빗물에 씻긴 깨끗해지고 상쾌한 기운이 빨려 들어가 세월의 질서 탓에 때 묻고 얼룩진 영혼이 정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까닭에 어느새 나도 비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랑하게 되면 누구나 조금쯤은 마음에 드는 얼굴로 보인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얼굴이라는 것만으로 누구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얼굴이 마음에 들게 됐든지 마음에 드는 얼굴이라서 사랑하게 됐든지, 어쨌든 그 두 가지의 행복한 일치는 드문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마음에 드는 얼굴을 가졌다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지만 행복한 일이다.
시간이 흘러 A는 비가 오는 어느 날 살갗을 차갑게 때리는 굵은 장대비처럼 이별을 말했다. 그리고 이 이별이 운명이라고 말했다. 바람에 휩쓸려 요동치는 얇은 빗줄기는 진회색 빌딩숲에서 콘크리트 벽을 무대 삼아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서글픔을 위로해주지 못할 망정 세계의 사물들을 뼛속까지 적시고야 마는 잿빛의 축제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빗줄기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작은 바람에도 흩날리는 얇은 빗방울처럼 우유부단하게 살아온 나는 한마디도 전하지 못하고 A를 보내야만 했다. 나의 감정을 정당한 의미를 지닌 언어로 바꿀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운명이라도 되듯이 체념으로 스스로의 몸을 결박해 버렸다.
우유부단한 사람에게는 운명에 순순히 적응한다는 장점도 분명히 있을 거라는 확신을 품은 채 A가 떠난 자리에서 홀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공백은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다가 어느 순간 커다란 공동(空洞)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구멍 안에는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허무가 있었다.
마음이 몹시 메마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내 속에 있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 사람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안고 있던 공백을 메울 수는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공백은 그녀만의 것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사랑은 이기심의 뿌리를 먹고 자란다는 것을. 그래서 마지막은 늘 배신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하지만 다행히도 배신은 사랑에 대한 기억을 환멸로 바꿔놓지는 못했다. 그녀는 아마 이것 때문에 이 이별이 운명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언젠가는 떠난다. 그러니 당장 사람을 붙드는 것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훼손시키지 않고 보전하는 것이 더 낫다. 사람은 떠나보내더라도 사랑은 간직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사랑을 할 수가 있다. 사랑에 환멸을 느껴버린다면 큰일이다. 삶이라는 상처를 덮어갈 소독된 거즈를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꼴이다.
나는 그대로 빗줄기만 본다. 문득 어느 소설에서 읽었던 문장들이 떠올랐다. 비는 땅에게는 생명이고 소녀에게는 그리움이나 약속이고 우산장수와 나막신 장수의 어머니에게는 인생의 모순된 단면이며 조종사에게는 결항이고 떠나려는 사람에게는 미련, 젖은 빨랫대에게는 노동의 전조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차단기이다. 나는 A의 뒷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보이는 것은 오직 비뿐이었다.
A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곳을 거의 벗어날 즈음 비가 걷히기 시작하더니 푸른 하늘이 다시 낯을 낸다. 지루한 장마 중간중간에 보이는 맑은 날씨는 아름답다. 곧 다시 바람이 몰아치고 하늘이 어두워지리라는 불안함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가끔 비 오는 날을 기다린다. 그때의 기억은 물냄새를 머금은 짙은 향기가 되어 마치 갇힌 그림자처럼 남아있다. 비를 좋아하게 된 까닭은 비가 그친 뒤 맑게 개인 날에 그 그림자를 슬쩍 보고 싶어서 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