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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와니 Aug 01. 2024

누구와 단둘이 꼭 가고 싶은 카페가 있나요?

초단편소설

그러던 어느 날 일요일 오전, 나는 노트도 사고 바람도 쐴 겸, 기숙사를 나와 교문 밖 문구점으로 향했다. 휴일이라 그런지 캠퍼스는 한산했다. 걷고 있자니 그녀가 떠올랐다. 동아리방이 가까워져 올수록 왠지 그녀가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도 혼자서. 하지만 그녀는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했기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동아리방을 그냥 지나쳐갔다. 문구점에서는 지우개를 하나 샀다. 딱히 필요가 없었는데도. 근처에 사는 기영 선배에게 연락을 할까 했지만 그냥 기숙사로 돌아섰다. 다시 동아리방에 가까워져 올수록 그녀가 떠올랐다. 이번에 정말 그녀가 거기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확신 같은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미 나는 동아리방 문 앞에 다다라 있었다.

문을 열자 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아리방에 그녀 혼자뿐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동아리원들이 끼적이는 날적이를 읽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도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으레 하는 인사말이 오갔다. 그리고는 어색한 침묵. 나는 그녀가 보던 날적이를 집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가 날적이를 휙,하고 빼앗아갔다. 나는 달라고 했다. 그녀는 안 된다고 했다. 억지로라도 뺏으려고 나는 테이블을 돌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우리는 테이블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그녀가 그만,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는 날적이를 펼치더니 한 장을 북 찢고는 나에게 건넸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에 잠긴다. 그녀는 날적이를 읽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쓰고 있었던 것이라고. 만약 그날 내가 동아리방을 그냥 지나쳐갔다면, 그래서 그녀가 쓴 글을 나중에 우연히 보게 되었더라면. 가정 같은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날 이후 우리는 조금 가까워졌다. 연락도 더 자주하고, 남녀 기숙사 갈림길 근처 쉼터에서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일 년 선배였고, 나는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는 신입생이었으니까. 언젠가 기영 선배가 술자리에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녀는 내가 가장 연애하고 싶은 여자였다, 잘해봐라. 그래도 나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지난 어느 가을, 저녁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은 동아리 정기 모임이 있던 날이어서, 나는 7시쯤 우산을 쓰고 동아리방으로 갔다. 웬일인지 그동안 뜸하던 그녀가 먼저 와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나는 일찍 동아리방을 나왔다. 기숙사로 걸어가는데, 우산을 놓고 온 것이 생각났다. 내리던 비가 그쳐 있어 깜박한 것이었다. 나는 우산을 가지려고 다시 동아리방으로 걸어갔다. 도중에 기숙사로 올라오는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가 먼저 내게 어디가냐고 물었다. 나는 우산을 놓고 왔다고 말했다. 그녀가 웃으면서 가볍게 나에게 바보라고 했다. 나도 웃었다. 동아리방으로 걸어가는 동안 바보라는 말이 계속 귓전을 울렸다. 바보↑, 바보↓, 바보→, 바보←. 나는 우산을 들고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숙사로 들어가기 전에 붙잡아야 했다. 갈림길까지 뛰어갔을 때, 여자 기숙사 정문 앞에 거의 다다른 그녀가 보였다. 나는 큰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돌아서서 나를 봤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나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우리는 교문을 나와 내가 평소에 그녀와 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강변 카페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쳤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인지 강풍까지 몰아치며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펼쳤다. 우산이 종이장처럼 뒤집혀버렸다. 그녀도 자기 우산을 펼치려 했지만 때마침 고장이 났던지 펴지지도 않았다. 내가 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우리는 쫄딱 비에 젖어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에 들어서는 우리를 모두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종업원이 수건과 함께 메뉴판을 건넸다. 그녀가 수건으로 얼굴과 목주변을 훔치며 말했다. 우유 따뜻하게 데워주실 수 있으세요? 나는 레몬차를 시켰다.

주문한 것이 나올 동안 침묵. 그녀가 몸을 떨었다. 나는 미안했고, 내가 무척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가까운 곳으로 갔으면. 앞서도 얘기했지만 가정은 어리석은 짓이다. 주문한 우유와 레몬차가 나왔다. 나는 레몬차를 한 입에 다 마셨다. 술을 마시듯이. 그런 나를 보면서 그녀가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또 침묵.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녀를 향한 미안한 감정이 발문을 가로막았다. 반 시간쯤 지났을 때, 그녀가 나에게 왜 아무 말도 없냐고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만 가요. 젖은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요.

비는 얄궂게도 금세 그쳐 있었다. 우리는 카페 처마 밑에 서서 잠시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쳐다봤다. 나는 말없이 내 우산을 그녀에 손에 쥐어주고는 뛰기 시작했다. 왜 그래, 라는 물음을 스스로 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한참 뛰고 나서야 학교와 더 멀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디선가 바보,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다음날 동기 여자애가 미애 언니가 나에게 주라고 했다며 우산을 건넸다.

제대 후 복학을 했지만 그녀는 이미 졸업하고 없었다. 복학 후의 대학생활은 취업준비로 빠르게 지나갔다. 어리석은 확신이나 가정 같은 것도 없이. 어느 날 어디선가 그녀의 결혼소식이 들려왔다. 상대는 기영 선배였다. 고민하다가 결혼식에 참석했다. 선배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신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갈 때보다 무척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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