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기억하지만 그 사람 얼굴이 가물거린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반대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람 얼굴은 또렷이 기억나는 부류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얼굴까지 가물거리며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내게 메밀 소바 여인으로 기억될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망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녀를 정말 우연히 만났다. 그 우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정말 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나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같이 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성급했다거나 그래서 후회스럽거나 하지는 않다. 다시 돌아가도 아마 그럴 것이다. 후회스러운 것은 따로 있다.
꽃샘 추위가 막 지난 어느 일요일 오전, 그녀는 그녀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살던 집을 정리하고(나는 뭐 정리랄 것도 없었다), 며칠간 함께 발품을 팔고 얻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전에 살던 집보다 조금 더 넓은 오피스텔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방에 내려놓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왜 웃냐고 그녀가 물었고, 나는 그냥 웃음이 나온다고 말했다. 나도 똑같이 물었는데, 그녀도 그냥 웃음이 나온다고 말했다. 아마 서로가 가지고 온 이삿짐이 너무 간소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니면 마냥 좋았거나. 그래 그렇다. 가진 것은 없지만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던 그런 시절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짐을 정리하던 중에 우리는 물을 따라 마셨는데, 그때 그녀가 말했다.
“우리 나가서 예쁜 컵을 사 오자.”
그녀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러리라고 각오했던 사람처럼 말했다. 각자 가져온 컵이 낡고 헌 것이었고, 서로 어울리지도 않아 보이기는 했다.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여기저기 어지럽게 놓여 있는 짐들을 그대로 놔두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걸어서 모든 물건이 다 있다는 가게로 갔다. 그곳은 다행히 가까운 데에 있었다. 컵을 파는 데는 가게 3층이었다. 우리는 3층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컵을 보러 갔는데 다양한 그릇들이 많아 우리는 정신없이 그것들을 구경했다. 너무 많아서 적당한 것을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도중에,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의 시간이 비교적 느리게 흐르고 있을 때였다.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컵이며 그릇 같은 것들을 집었다 내려놓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고른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이거 어때?" 그녀가 하얀 바탕에 청색 무늬가 어지럽게 그려진 오목한 그릇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조금 있으면 곧 여름인데, 여름엔 메밀소바가 제일이지."
그녀는 눈앞에 메밀소바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만들 줄 알아?”
“그럼! 쉬워. 어떤 일본 영화에 그런 장면이 있었어. 여름엔 국수가 최고지, 하면서 몇 번을 먹는데 그렇게 먹고 싶을 수가 없었어. 그때부터 나도 국수를 좋아하게 됐어. 그전까지는 별로였는데.”
“제목이 뭔데?”
“그건, 기억이 나지 않아. 그냥 그 장면만 기억나.” 그리고는 그녀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한 번 더 말했다. “여름엔 메밀소바가 최고지!”
나는 그녀가 말하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 메밀소바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먹어 본 적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메밀 소바 그릇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내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내 반응으로 인해 그녀가 무언가를 포기한 것은 아닐까 하고. 내 의도는 무관심도 아니었고, 사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만약 그녀가 나 때문에 그릇을 내려 놓은 것이라면 그거야말로 오해였다. 그러나 나는 망설이다 말하지 못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그릇을 사도 좋다거나 메밀 소바를 먹고 싶다거나 하는 말. 혼자만의 예민한 감정일 수도 있다고 여기며 그 순간을 지나쳐버렸다.
“다음에 사자. 여름이 오면 그때 가서.”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곧 밝은 얼굴로 다른 것들을 들어 보이며 떠들어댔다. 나도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금세 또 들었다놨다는 반복하며 떠들어댔다. 가게를 나오면서, 우리가 산 것은 고작 겉은 붉은색이고 속은 하얀 컵 두 개와 밥그릇도 되고 국그릇도 될 만한 크기의 그릇 두 개뿐이라며, 우리는 또 서로를 보며 웃었다. 하지만 처음 웃음과는 다르게 왠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감돌았다. 여름이 왔지만 우리는 메밀 소바 그릇을 사지 않았다. 그녀와 1년 반 정도를 같이 살면서도 메밀 소바를 만들어 먹은 적도 없었다.
여름이 되면 나는 종종 메밀 소바를 혼자서 만들어 먹는다. 그때마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녀를 떠올린다. 그녀와 한 번은 메밀소바를 만들어 먹었어야 했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혼잣말을 한다. 여름엔 메밀 소바가 최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