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와니 Aug 02. 2024

캐빈에 대하여




영화 <캐빈에 대하여>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에바(틸다 스윈튼)는 어두운 교도소의 복도를 걸어나온다. 

왜 그랬어?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캐빈은 이제 만 18세, 성인이 되어 성인 교도소로 이감을 앞두고 있다. 영화 내내 분노로 가득찼던 그의 눈빛이 조금은 달라진 듯도 하다. 


이 마지막 대사를 통해, 나는 이 영화가 마음(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미움, 사랑 그딴 것들)이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특히, 어릴 때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그러다 어른이 되면서 보통은 그 확신이란 것을 조금씩 의심하게 된다.(그러지 않는, 어린애 같은 어른들이 많지만)


아마도 캐빈은 엄마에 대한 미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엄마에 대한 사랑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2년 간의 시간(교도소 수감 기간) 동안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보는 눈빛이 이렇게 바뀌었으니까....


 

이 포옹은 그동안의 거리감(에바-캐빈)의 소멸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둘은 진한 포옹을 한다. 엄마를 바라보는 캐빈의 눈빛이 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에바가 원치 않는 임신(캐빈)을 하면서부터 육아 기간 내내 아들과 엄마 사이에 거리라는 것이 존재한다. 



아기 캐빈을 안은 아빠와 에바, 둘은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심지어 에바는 캐빈을 임신하던 중에도 거리를 둔다. 그건 마음의 거리이다. 어린 캐빈과 놀이를 할 때도, 공부를 시킬 때도 에바는 캐빈과 거리를 둔다. 


그렇지만 캐빈은 엄마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잘못된 방식으로. 엄마의 관심을 미움의 방식으로 끌고자 한다. 똥쏴지르기로. 기저리를 갈아줬는데 일부러 다시 똥을 쏴 지른다. 화가 난 에바가 캐빈을 들어 던져버리는데, 때문에 캐빈의 팔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흉터)가 생긴다. 

끝내 좁혀지지 않은 엄마와 아들 사이의 거리가 단 한 번 좁혀질 때가 있다. 캐빈의 아팠을 때, 자신을 걱정하며 동화책(로빈후드) 읽어주던 때이다. 



그런 다음부터 캐빈은 로빈후드처럼 활쏘기에 전념한다.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아들이 얼마나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지. 


언젠가 티비에서 방영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철봉을 체조선수만큼이나 잘 하는 어린애가 나왔는데, 알고 봤더니 아주 어릴 적 철봉하는 아들을 보면서, '잘 한다'라는 한 마디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자식에게 엄마의 사랑과 관심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영화 속 엄마와 아들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급기야는 캐빈이 일을 저지르고 만다. 


'뚫어뻥'으로 여동생의 눈이 실명되게 하고, 자전거 잠금방치를 주문한 후 '대사'(아빠와 여동생을 활로 쏴 죽이고, 미리 구입한 자전거 자물쇠로 학교의 출입구를 잠그고서는 학생들을 활로 쏴 죽이는)를 실행하기에 이른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 때문에 캐빈이 여기까지 이른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아마도 관객들은 에바를 의심할 것이다. 

임신을 행복해하지 않는. 

아이를 여행가라는 자신의 캐리어에 장애라고 생각하는.

아무리 문제아지만 자식에게 폭력까지 가하는 에바를.

태아교육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아미도 

그런 엄마의 마음이 태아 때부터 캐빈에게 전달됐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나서, 끝까지 아들 캐빈을 놓치 않는 에바를 보면서

동네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칠해 놓은 붉은 페인트를 손수 지우는 에바를 보면서

그렇지마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그러한 통념에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닐까. (관객들이 그렇게 생각하게끔 하면서)

여성으로 반드시 임신을 축복이라고 여겨야만 하는가.

자신의 삶과 아이를 돌보는 일 중에 반드시 후자를 더 우선시 해야만 하는가.



겨우 재워놓은 아이를 남편 프랭클린이 아내의 부탁에도 깨우고 만다. 

아이는 남편의 품 안에서 평소와 다르게 울지 않는다. 

엄마와는 그렇게 악숙인 캐빈이 아빠와는 여러 놀이를 하면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장면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너희들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꼭 그렇지 않아. 너희들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 봐."




"엄마는 캐빈이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요즘 엄나는 매일 아침 이런 소원을 빌어. 여기가 프랑스였으면 좋겠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 또한 에바의 이 말을 아이한테는 절대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보면서, 엄마 이전에 한 인간으로 품고 있는 소중한 꿈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가로서 지금 이곳이 프랑스였으면 하는 바람이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영화는 모든 일이 있고 난 후, 도대체 무엇이 잘못이었나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에바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에바가 캐빈에게 물었던 것이다. 


"왜 그랬어?"


 그리고 캐빈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이유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꾸만 이유를 찾는 것은 어쩌면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식 안에서의 인과율일 뿐이다. 그러한 대상이 마음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프로이트, 융, 아들러를 비롯해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마음을 인과적으로 접근하고 놀라운 성과를 이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판단이지 않은가. 


  나 또한 아이들을 보면서, 그 원인을 부모에게서 찾았었다. 특히, 엄마에게서. 가정의 중심은 아무래도 어머니란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러한 생각 또한 편견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다. 가끔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모든 생각이 편견이다. 어떤 생각이 편견이지 않은가. 다수의 생각? 소수의 생각?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에서 벗어난 생각? 생각해보면 모든 생각이 편견이다. 


"엄마의 본능으로서의 모성 또한 편견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부처도 이러한 고민을 했으리라. 중용이란 인식의 고정된 위치를 벗어나 끊임없이 균형적인 무게중심을 찾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절대적 상대주의와의 구분점을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 중용은 편견의 실마리인 것만 분명해 보인다. 




작가의 이전글 메밀소바 여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