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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로롱도로롱 May 14. 2024

꼴랑 교사 1년 해보고 적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 2

교권에 대하여


교권, 교사의 권위는 단연 교육계에서 작년 한 해 가장 뜨거운 화두였다. 교권이란 것이 존재하긴 하는가, 필요한 것인가 등과 같은 물음에 대해 현장 교사들은 그런 것은 애저녁에 사라졌다는 식의 답이 쏟아진다. 그것은 아마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변화로부터 기인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스승의 날 이브를 맞아 이에 대한 생각을 젖먹이 교사의 시선에서 가감 없이 논해보고자힌다.


필자는 초등 5학년부터 진로희망에 초등교사라고 적어왔으며, 입시막판에 사회교사로 바꾸어 지금은 사회교사가 되어버렸다. 꽤나 오래전부터 교직에 대한 생각을 가진 만큼 이미 고등학교 때 교권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해 두었다. 교사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이에 대한 답으로 지식, 경험, 존경을 들 수 있다. 지식은 말 그대로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그것을 전수해 주는 사람이기에 권위가 생기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청출어람이란 말도 있듯, 학교에 가보면 나보다 내 과목에 대해 더 출중한 실력(수능으로 평가한)을 가지는 학생은 나오기 마련이다. 두 번째로 경험을 들 수 있는데, 선생의 어원처럼 학생보다 먼저 살아온 자로써 학생은 교사를 통해 삶의 지혜(?) 같은 것을 배우므로 권위가 생기는 것이다. 마치 마을 원로에게 고견을 물으며 존중을 받듯 말이다. 하지만 나이 = 지혜라는 항등식은 깨진 지 오래며, 교사의 삶도 교사마다 천차만별임과 동시에 세간의 교사에 대한 평이 '사회생활을 안 해보고 학생들과만 어울리니 세상물정에 대해 모른다'로 변해감으로써 그 설득력을 잃게 된다. 마지막으로 존경이다. 이 존경은 앞서 나온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으로 나는 '부모'와 비슷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나를 지지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그들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존경으로 표현되며 권위가 생기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인 얘기지만 난 내가 '존경'을 통해 '교권'을 얻어내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앞선 논의는 어디까지나 내가 고등학교때 했던 생각이므로 현장의 교사의 시선과는 동떨어져있다. 오늘날 나에게 존경을 통해 교권을 얻으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화를 낼 수도 동조할 수도 없다. 존경이 생성되는 과정은 매우 오래 걸리며, 일부 우연한 사건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부모도 존경받기 어려운 세상에 학교에서 오래 봐야 한두 시간 보는 교사가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게다가 수업에서는 거의 학업적인 얘기만 하고 생활지도의 경우 학생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해야 하기 일쑤이다. 학생은 어리며, 그만큼 많은 실수와 잘못된 생각들을 하기 때문에 이를 교정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과거엔 부모가 악역을 자처했다면, 이제는 교사가 악역을 자처해야 한다. 악역을 자처하는 교사를 나무라는 부모도 있으니 교사의 입지는 더욱 난처해진다. 하기 싫은 공부 얘기 한 시간에 듣기 싫은 잔소리 한 시간, 총 두 시간 얼굴 보는 교사에게 존경심을 갖는 것은 상식적으로 봐도 어렵다.  그럼 지금껏 존경을 받은 교사들은 무엇이냐 묻는다면 물론 그들의 뛰어난 인품도 있겠지만, 큰 부분이 응당 그래야 한다는 사회적 시선과 부모의 가르침, 그에 더해 나이가 들어서 어린 시절 자신의 잘못을 꾸짖어준 악역이 사실은 질서를 수호하는 '다크나이트'였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에 했던 생각일 것이다. 즉 어렸을 때는 별로 존경하지 못하고, 교사를 존경하게 된 순간은 이미 그가 학교를 떠나 어른의 문턱에 섰을 때, 속된 말로 둘리보다 고길동을 이해할 때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존경을 받으려면 자신의 잘못을 대신해 희생하거나, 뭔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을 함께 해결하는 등 우연한 사건이 필요하다. 흔히 드라마 같은 데서 나오는 존경받는 교사처럼 말이다. 그런 일은 아쉽게도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교사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나마 가끔 보는 그 시간에, 내가 당신들보다 많이 알고, 더 지혜롭고, 당신들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분명 스스로도 '권위'라는 말에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정과 사회의 분위기도 중요하다. 학교란 곳에 오는 이유는 첫째로 배움이다. 부모에 입장에서도 교권이 보장되는 편이 학생들의 배움의 효과가 크다. 애초에 권위 없는 사람이 25명 앞에서 떠드는 말은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많은 부모들이 학교의 목적을 '보육'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나 학교급이 내려갈수록 그러한 경향을 보인다. 때문에, 자신의 자녀가 '보육'의 의미에서 제대로 돌봐지지 않는다며 모욕적인 언행을 하는 초등부모의 뉴스가 종종 보인다. 고등으로 오면 교육도 보육도 아닌 '입시'로 목적은 완전히 굳어져 그와 관련된 것에만 눈에 불을 키고 민원을 제기하기도 한다. 교육에서의 교사의 자율권은 쌍끄리 무시하고, 입시에 조금이라도 흠이 될까 생활기록부 정정 따위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민원들은 솔직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디까진 '배움'이 먼저고 보육과 입시는 부차적인 문제다. 이것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어려운 말들을 차치하고 교사와 부모는 동료다. 자녀를 잘 키워보고자 노력하는 부모와 학생을 잘 가르치고자 하는 교사가 서로를 불신하며 싸우면 결국 아이만 불쌍해지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존중은 동료 간에 필수적인 요소다. 그 정도의 존중을 교권이라 부르든 말든, 나는 별로 관심 없다. 학생들이 스승의 날마다 찾아와서 감사를 표할 만큼 나를 존경하지 않아도 좋다. 그렇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존중은 필요하다. 그들의 배움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오늘날 존중은 교사와 학생간 뿐 아니라 사회와 가정도 힘을 모아야 만들 수 있는 아주 소중한 보석이다. 부디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우월전략'임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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