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겨울, 생기부 작성의 계절이다.
작년 이맘때는 17세 남성들의 장점을 더듬더듬 찾아가며, 미사여구와 장밋빛 환상을 섞여 그들을 묘사하는 글을 쓴 바 있다. 정말 힘든 일이었다. 사춘기의 남성들은 보통 교사와 무언가 말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고, 나 역시 17세 사춘기 남성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무미건조한 ENTP이므로 서로 마음을 나누는 느낌은 썩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진심으로 걱정하고 대화를 나눈 친구들은 학교를 떠나(자의든 타의든) 생기부를 써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해가 지난 지금은 평균연령 65세의 사랑스러운 담임반 학생들의 생기부를 채우고 있다. 이것은 놀랍게도 힘이 들지도 않고, 묘한 감동과 보람이 함께 한다.
나는 아이보단 노인이 편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손에 자라 애늙은이로 자라서 그런지 감성도 그쪽인듯하고, 애들에겐 내가 고개 숙여 억지로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려 했다면 노인(장년?)분들은 아주 저돌적으로 교사의 마음에 들어온다. 그들의 삶에 대해 묻지 않아도 이야기하고, 그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삶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초연하게 풀어낼 만큼 닳고 닳아서 마음을 울리는 면이 있다. 가령 오빠들 학교를 보내느라 당신은 학교도 가지 못했고 그런 아비가 너무 미워 서울로 덜컥 상경을 해서 안 해본 일이 없는 여학생의 이야기나, 배우가 되고 싶어 서울로 와서 배우 학원에서 만난 남편과 건설사업을 키워나가며 살고 있는 뭐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내가 능력 있는 작가였다면 한학급에서 현대소설 두세 편 정도는 너끈히 써내었을 것이다. 나보다 오래 살아온, 게다가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가 지금껏 고민해 온 것들이 사실 별 것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내가 앞으로 마주할 것들 역시 별 것 아니라는 위로를 건넨다. 그 위로가 내가 방통고에서 일하는 거대한 보람 중 하나이다.
내가 지금 작성하는 부분은 '행동발달사항'이라는 부분인데, 여러분의 생기부를 보면 아마 가장 마지막 페이지쯤에 각 학년 별로 담임교사가 여러분을 일 년간 관찰한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을 텐데 바로 그것이다. 아마 그나마 생기부에서 가장 진솔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어린 학생들에게는 대입과 관련된 내용을 녹일 수밖에 없겠지만, 부모보다도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이 당신에 대해 솔직하게(적어도 더 좋게) 써준 것이므로 읽어보면 몽글몽글 학창 시절을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대충 당신이 어떤 학생이었든 "이 학생은 이런 점이 좋고, 공부는 이렇게 열심히 하며, 앞으로 이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라고 하는 식이다. 묘사보다는 기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분들은 이미 육십 줄에 들어선, 나보다 훨씬 어른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평가하고, 거기에 더해 장래까지 써주는 모습이 썩 웃기지 않을 수 없다. 가령 70세인 우리 반 최고령자분에게 배려심이 깊다든지 복지 분야의 장래가 촉망된다고 꼴랑 스무여섯 해를 산 내가 묘사하는 것은 내가 보기엔 조금 건방지다. 그래서 나는 거의 편지에 가까운 식으로 쓰고 있다. 이분들이 자신의 일 년을 추억하고, 자신의 자녀, 그 자녀의 자녀에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생기부의 서술에는 나름의 규칙이랄 게 있겠지만 알게 뭔가. 나도 행복하고 이분들도 행복하면 그만인 것 아니겠는가. 역시 난 건방진 사람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편지라고 생각하니 더욱 진심을 다하고, 대충 쓰기 어려워진다. 이 글을 그들의 가족이 본다라고 생각하면 진심으로 이 사람을 멋진 사람이라고 써주고 싶어 진다.
나 같은 사람이 선생을 하면서 감동을 느낀 몇 순간들이 있는데, 자퇴한 학생이 스승의 날 연락했을 때와, 보호시설에 간 친구가 검정고시를 붙었다고 연락했을 때, 마지막 한 가지는 방통고 담임반 학생들의 행동발달사항을 작성하는 지금이다. 이런 보람으로 적은 급여와 추락한 교권 같은 불만을 상회하고 살 수 있다면 행복한 교사로 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나는 이분들을 만나서 큰 힘을 받았다. 이분들에게도 부디 나의 그런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