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드 라 투르의 1752년 작품이다. 청회색 종이에 파스텔로 그렸다. 177 x 131 cm 크기로 루브르 리쉘리외관에 있다.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Maurice Quentin de La Tour, 1704–1788)는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파스텔 초상화가로, 로코코 시대의 인물 묘사에 있어 새로운 생명과 심리를 불어넣은 화가이다.
1704년 9월 5일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의 생캉탱에서 출생하여 1788년 2월 17일, 고향 생캉탱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주로 파리에서 활동하며 루이 15세 궁정의 공식 초상화가로 활약했으며, 파스텔을 사용한 초상화를 특화하여 독특한 색채와 질감을 묘사하고, 대상 인물의 표정의 미묘한 변화를 탁월하게 표현했다. 그의 파스텔 초상화는 1737년부터 수십 년간에 걸쳐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의 살롱 전시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
드 라 투르의 초상화는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궁정 문화의 시각적 기록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초상화는 단순한 미술 작품이 아니라, 그 시대 인물들의 정신과 사회적 역할을 시각적으로 해석한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볼테르(Voltaire),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장 르 롱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등 당대 명성을 떨친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초상화를 남겼다. 특히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는 여성이 예술과 권력을 통해 자아를 구현한 이례적인 사례의 기록물이다.
퐁파두르 부인의 본명은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Jeanne-Antoinette Poisson)이다. 그녀는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Maîtresse royale)로서, 예술, 철학, 정치에 깊이 관여하며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녀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루이 15세의 총애로 퐁파두르 후작(Marquise de Pompadour)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Charles Guillaume Le Normant d'Étiolles)과 결혼했지만,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면서 사실상 별거 상태를 유지했다. 루이 15세는 샤를 기욤에게 터키 대사직을 제안하며 궁정에서 멀어지기를 원했지만 샤를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버려진 남자’로서 아내의 배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끝내 공식적인 이혼을 거부했다.
퐁파두르는 프랑수아 부셰, 드 라 투르, 샤르댕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로코코 미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또한, 백과사전파(Encyclopédistes)인 디드로,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계몽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지성을 과시하며 교육을 장려했다. 왕립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는데, 후에 나폴레옹이 여기에 입학했다.
그녀는 당시 문화적 아이콘으로서도 명성을 떨쳤는데, 퐁파두르 헤어컷, 퐁파두르 로즈(장미), 퐁파두르 슈즈 등은 당대 최대의 유행 상품이었다.
루이 15세는 퐁파두르를 비공식 고문으로 활용했으며, 이에 따라 그녀는 프랑스의 외교, 재정, 인사 문제 등에 있어 깊이 관여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제1차 베르사유 조약)을 지지하며, 프랑스 외교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평민 출신 여성으로서 왕의 정부로 발탁된 것은 물론이고 궁정의 정적들 사이에서 20년간 왕의 신임을 유지하며, 자신의 지성과 문화적 비전을 관철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퐁파두르 부인은 당시 여느 여성과는 다른 면모를 가진 것은 분명하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연인이며,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로 유명한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녀를 여권운동의 선구자로 평가한 적이 있다. 퐁파두르 부인 자신도 “나의 삶은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라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드 라 투르는 <퐁파두르 부인>은 퐁파두르 부인을 단순한 미모나 애첩의 이미지가 아닌, 지적이고 교양 있는 사회적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 속의 퐁파두르 부인은 악보와 책, 건축 도면, 판화. 스케치북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는 그녀의 예술적 재능과 계몽주의적 관심을 상징하고 있다. 그녀는 의상은 화려하지만, 보석이나 장신구는 거의 없는데, 이는 외모보다는 내면의 교양을 강조하려는 의도다.
테이블 위에는 디드로 · 달랑베르의 <백과전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볼테르의 <앙리아드> 등 계몽주의 문헌이 놓여 있다.
이 작품은 퐁파두르 부인을 ‘팜므 파탈’에서 ‘팜므 사방트(지성 있는 여성)’로 변신시킨 시각적 선언문이었다. 그녀는 이 초상화를 베르사유 궁전 거실에 평생 걸어두었으며, 관람 대상은 바로 그녀의 정부 루이 15세였다. 이는 “나는 더 이상 육체적 매력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의 말벗이자 문화적 동반자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퐁파두르 부인이 사실상 주도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와의 동맹에 관해 짚어 본다.
이는 1756년에 체결된 프랑스(부르봉 왕가)-오스트리아 동맹을 말하며 이는 7년 전쟁(1756년–1763년)의 서막으로서, 당시 유럽 외교 질서를 뒤흔든 ‘외교 혁명’이라 불릴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미 왕위 계승 전쟁(1740년-1748년)에 지쳐 있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즉위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1740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카를 6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함에 따라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하려 했지만 살리카 법(여성 왕위 계승 금지법)을 근거로 주변의 여러 국가가 이에 반대했다. 카를 6세는 생전에 ‘국사 조칙(Pragmatic Sanction)’을 통해 딸의 계승을 인정받으려 했지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대왕은 이를 반대하고 슐레지엔(Silesia) 지역을 침공하여 프로이센에 합병했다.
오스트리아 슐레지엔은 지금의 폴란드 남서부-체코-독일에 이어지는 지역으로 풍부한 자원과 전략적 위치를 가진 중요한 지역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혈통과 과거 조약(브리크 조약)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에 직접적인 전쟁이 시작되고, 다른 유럽 열강들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전쟁에 참전했다.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며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를 체결했다.
프랑스, 스페인, 바이에른 등은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확보를 지지하며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
전쟁은 8년 이상 계속되고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확보하며 유럽 강국으로 부상했다.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왕위를 지키게 되어 정치적으로는 승리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에게 영토의 일부를 빼앗긴 것은 충격으로 외교 전략을 전환할 결정하게 된다. 이에 1756년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에 복수를 다짐했다. 프로이센은 식민지 경쟁에서 프랑스와 맞서고 있는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고 오스트리아-프랑스 동맹과 대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퐁파두르 부인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서신 교류를 통해 동맹을 강화하고 프랑스 궁정 내의 외교력을 결집해 갔다.
1756년 프랑스와 영국 간의 식민지 패권 경쟁이 격화되며 유럽은 물론이고 북미,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 식민지 국가를 두고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동맹관계인 프랑스를 지지하며 영국과 프로이센 등의 동맹군을 상대로 참전했다. 전쟁은 7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에 세계사는 이 전쟁을 7년 전쟁이라 기록하고 있다.
7년간이나 진행된 세계적인 전쟁은 영국의 대승, 프랑스의 대패로 끝은 맺었다. 1763년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은 전쟁의 결과를 계산한 정산서와 다름없었다.
조약의 결과로 프랑스는 북미 캐나다와 루이지애나 동부의 식민지를 영국에 양도해야 했다.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영국에 넘기고, 대신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서부 지역을 넘겨받기로 했다.
영국은 북미와 인도에서 식민지 패권을 확립하고,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한편, 프랑스는 인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유럽 내에서의 세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오스트리아도 슐레지엔을 탈환하지 못했다.
7년 전쟁과 파리조약은 근대 국제 질서의 재편을 가져왔으며, 이후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는 식민지 상실로 인해 재정난에 빠졌고, 이는 프랑스혁명(1789)의 원인이 되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주도하고, 영국과 세계적인 일전을 벌였으나 전쟁 실패로 정치적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 15세는 그녀를 계속 신뢰했고, 퐁파두르 부인은 예술과 문화 후원자로서 역할을 지속했다.
퐁파두르 부인은 1764년 42세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사망하며 루이 15세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파리의 카푸친 수도원 묘지에 묻혔으나, 그가 평민 출신이고 정식 왕비가 아니었으며, 궁정 내 예술을 빙자하여 사치를 일삼고 외교에 관여하여 무리한 전쟁을 주도했다는 등의 비판을 받음에 따라 묘비에는 이름도 제대로 새겨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평민 출신 보통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활동의 지평을 확대하고 프랑스 문화 예술의 중흥을 선도했다는 점에서 18세기의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같은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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