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퐁텐블로파 중 누군가의 1595년경 작품이다. 96 x 125 cm 크기의 패널에 유채로 그렸다. 루브르 박물관 리슐리외관에 전시되어 있다.
퐁텐블로파(École de Fontainebleau)는 16세기 프랑스 퐁텐블로 궁전에서 활동한 예술가 그룹을 말한다. 이들은 단순한 ‘그룹’이 아니라, 국제적 협업을 통해 프랑스 궁정 미술의 양식을 새롭게 창조한 전문 화가 그룹이었다. 이탈리아의 매너리즘과 프랑스의 우아함을 결합하여 독자적이고 새로운 개념의 프랑스 미술 양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퐁텐블로파의 탄생은 프랑수아 1세의 강력한 예술 장려 정책에서 기인했다.
루이 12세를 이어 1515년에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프랑수아 1세는 예술과 인문주의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예술을 프랑스에 도입하여 프랑스 르네상스를 예술을 개척한 인물이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만나 프랑스로 초청했으며, 레오나르도는 앙부아즈 근처의 클로 뤼세 저택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때 <모나리자>를 완성했다.
프랑수아 1세는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 속에 있는 왕실의 사냥과 휴식을 위한 작은 별궁을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초빙하여 르네상스 양식의 퐁텐블로 궁정으로 개축하고 프랑스 르네상스 예술의 전당으로 활용토록 했다.
이때 피오렌티노, 프리마티치오 등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들이 퐁텐블로 궁전에 초빙되어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한 예술가 집단을 ‘1차 퐁텐블로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 앙리 4세의 후원 아래 퐁텐블로를 중심으로 활동한 뒤브레이유, 뒤부아, 프레미네 등 프랑스 예술가들은 ‘2차 퐁텐블르파’라고 부른다.
퐁텐블로파의 화풍은 이탈리아의 매너리즘을 프랑스적 감성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은 얼굴에 길게 늘어진 신체를 갖고,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탈리아 매너리즘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여성은 창백한 피부에 부드러운 곡선미를 부각하여 관능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복장이나 배경은 복잡한 장식과 스투코(석고 부조), 가죽이나 양피지 모양의 틀, 신화적 오브제, 정교한 벽화 등을 활용하여 품격을 높이고, 그림 속의 스토리는 다이애나의 사냥, 비너스의 목욕 등 신화적 상상력에 현실적 풍광을 가미하고 있다.
퐁텐블로파의 대표작 중 하나인〈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녀의 동생〉(Portrait of Gabrielle d’Estrées and one of her Sisters, 1594)은 누드 초상화를 통해 권력, 사랑, 여성의 감성 등을 복잡하게 녹여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정부였던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녀의 여동생을 욕조 속의 나체로 묘사하여 관능미 속에 숨겨 있는 정치적 메시지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앙리 4세의 가장 사랑받은 애첩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셋이나 낳았고, 정식 왕비로 입성하기로 예정되었지만 결혼식 일주일 전 임신 중인 상황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동생 줄리앤 히폴리트도 귀족 가문과 결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속 가브리엘의 반지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는 앙리 4세와의 결혼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동생 줄리앤은 언니의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꼬집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는 임신이나 다산을 의미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동성애를 암시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욕조 속 나체는 관능성과 순수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기법으로 퐁텐블르파의 특징적 양식이다. 붉은색 커튼은 연극의 무대와도 같이 왕실 내부의 은밀성을 대변하고 있다. 뒤편의 하녀는 아이 옷을 만들고 있는데, 이 또한 임신과 출산을 예고하는 복선이라 할 수 있다.
앙리 4세는 부르봉 가문 출신의 첫 왕으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군주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종교 전쟁을 종식하고 프랑스의 통합과 번영을 이끌며 ‘선량 왕(le bon roi)’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프랑스 왕으로 즉위하기 전 현재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지역의 나바르 왕국의 왕(앙리 드 나바르)이었으며 위그노(개신교)의 수장이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종교 전쟁이 격화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는 양측의 화해 무드를 조성할 목적으로 가톨릭 가문의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했다. 사실 앙리 드 나바르의 부르봉 가문은 마르그리트의 발루아 왕가와 이미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혼인은 정치적 목적의 정략적인 근친혼이기도 했다.
개신교도인 앙리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고 종교전쟁을 마무하는 등의 일련의 사건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새벽 파리 생제르맹 로세루아 성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가톨릭교도들이 개신교 교도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한 사건이 발생했다. 파리에서 시작된 학살은 순식간에 리옹, 툴루즈, 보르도 등 지방으로 번졌으며, 위그노 지도자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 등 약 2만~7만 명으로 추산되는 개신 교도들이 살해됐다.
이 학살 사건의 배경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긴 하나, 정치적으로는 당시 프랑스 왕 샤를 9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앙리의 왕비 마르그리트의 어머니)가 프랑스 내 위그노 세력의 확대를 경계하기 위해 가톨릭 귀족들과 공모하여 학살을 계획했다는 주장이 대세로 내려오고 있다. 당시 샤를 9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 카트린이 섭정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위그노의 수장인 앙리도 이 사건에서 살해 대상 순위 1위였지만 마르그리트가 그를 자신의 침대 밑에 숨기고 어머니와 가톨릭교도들에게 그의 소재를 끝내 밝히지 않은 덕분에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샤를 9세는 어머니가 연루된 이 학살 사건의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어려운 나날을 보내다 24세에 요절했는데, 그는 아들이 없었기에 후왕으로는 동생이 앙리 3세(마르그리트의 친오빠)로 즉위했다.
앙리 3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위그노의 입장을 배려하여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정치적 균형을 위해 나름 애썼는데, 이러한 행보가 가톨릭을 자극하게 되었고, 1589년 가톨릭 극단주의자인 도미니코회 수도사 자크 클레망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앙리 3세도 자녀가 없었고 여동생인 마그리트 말고는 남자 동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발루아 가문으로서는 더 이상 왕위를 이를 후손이 없는 실정임에 따라, 앙리 3세와 동서 간이면서도 이미 친척 관계의 부르봉 가문 출신인 앙리 드 나바라가 앙리 4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개신 교도였던 앙리 4세는 즉위 후 마그리트와 왕실의 권고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가톨릭 세력을 안심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낭트 칙령(1598)을 발표하여 위그노에게도 상당 부분의 종교적 자유를 회복시켜 주면서 종교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는 농업을 장려하고, 세금 제도를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파리에 운하를 건설하는 등 인프라를 확장하고 도시화를 추진하며 상공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문학, 예술, 건축을 장려하며 퐁텐블로파로 시작된 프랑스 르네상스 예술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이처럼 선량 왕이라 불린 앙리 4세도 개인적으로는 오입쟁이(le Vert galant)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연애 편력이 유별났다. 그의 주변에는 50명 이상의 정부가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여러 명의 정부 중에서도 앙리 4세가 가장 사랑한 여성은 그림 속의 여인 가브리엘 데스트레였다. 그는 가브리엘을 샤르트르 전투 중에 만나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프랑스 왕으로 즉위 직전 개신교의 수장으로서 개신교 전투원을 이끌고 가톨릭 동맹의 거점 도시인 샤르트르를 공격하는 군사작전을 주도했다. 그가 샤르트르를 공격한 것은 가톨릭 동맹이 개신교도인 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전투 중 앙리는 그 지방 귀족 가문의 딸 가브리엘을 만난 것이다. 그는 당시 마르그리트와 사실상 별거 중이었고 자식도 없었다.
1599년 앙리 4세는 교황에게 마르그리트와의 혼인 무효화를 요청하고 가브리엘과의 결혼을 추진했다. 앙리 4세는 가브리엘 사이에는 이미 세 명의 자녀가 있었고, 앙리는 이들을 합법적인 왕자와 공주로 인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8세는 교리 상의 이유와 정치적 목적으로 앙리의 이혼 요청을 거부했다. 이에 앙리는 교황청에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교황청은 결국 앙리의 이혼을 승인한다고 판결했다. 교황청이 이혼을 판결한 것은 이미 앙리가 마르그리트와 장기간 별거 중이고 자식도 없으며, 마르그리트도 이혼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앙리 4세는 바로 가브리엘과의 결혼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결혼식을 기다리던 와중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임신 6개월의 상태로 사망하고 말았다. 앙리 4세는 그녀의 죽음에 깊이 상심했고, 상복을 입고 왕비의 예우로 가브리엘의 장례를 치렀다
앙리 4세는 이후 정략적 이유로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출신 마리 드 메디시스와 재혼했다.
앙리 4세의 왕비였다 이혼한 마르그리트도 앙리 4세 못지않게 진정한 사랑을 좇아 살아간 여성이었다. 그녀는 흔히 마르그리트를 줄인 애칭 마고(Margot)라는 이름으로 ‘여왕 마고’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녀에게 있어 앙리 4세와의 결혼은 어머니 카트린 왕비의 정치적 계산에 의한 정략결혼에 불과했다.
마고는 결혼 전부터 프랑스 가톨릭 귀족 기즈 가문의 앙리 드 기즈와 깊은 사랑에 빠져 결혼을 계획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됐었다.
마고는 앙리 드 나바라와 결혼한 후에도 앙리에게서는 사랑을 찾지 못하고 궁정 내 여러 명의 귀족과 연인 관계를 가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중 조제프 드 라 몰과의 관계는 궁정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질 만큼 유명했다. 조제프는 프랑스 귀족이면서도 개신 교도였지만 마고는 그를 지적이고 매력적인 인물로 평가했고, 조제프 역시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깊은 인간적인 애정 관계는 프랑스 왕실의 정치적 음모와 종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비극적 종말을 맞고 말았다.
개신교도인 조제프는 가톨릭인 앙리 3세(마고의 오빠)의 왕위 계승을 반대한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그의 참수당한 시신은 사지가 절단되어 광장에 전시되기도 했다.
마고의 슬픔은 극에 달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여왕 마고>는 마고가 죽은 조제프의 심장을 향수병에 넣어 평생 간직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고는 말년에 파리에 거주하며 자서전을 기술하고 문학과 예술을 후원하며 조용하고 지적인 삶을 살아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고는 후대에 문학과 영화 등 예술 작품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대다수의 작품들은 마고를 단순히 ‘왕비의 도리를 저버린 음란한 여인’으로 치부하기보다는, 복잡한 정치적 현실에 내버려진 희생자이면서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간 지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고는 프랑스 왕가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살아간 여성이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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