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렘브란트의 1647년 작품이다. 패널에 유채로 그렸으며 76.6 x 92.7 cm 크기로 베를린 국립 회화관에 있다.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은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의 거장으로, 흔히 ‘빛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명암의 극적인 표현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사실 묘사를 넘어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깊이 있게 탐구한 회화적 성찰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606년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방앗간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레이던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미술에 전념하고 피터르 라스트만 등에게서 사사 받으며 특유의 화풍을 다듬어 갔다.
이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고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로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얼굴을 대상으로 수많은 자화상을 그리며 진정한 초상화 화법을 탐구해 냈다. 그는 화실의 빛과 어둠의 정도를 수없이 달리하고 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그려가면서 빛과 어둠에 따른 내면의 감정과 피부 질감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노년 시절까지 세월이 흐르면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가며 연령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내면세계를 정확히 묘사하는 방식을 찾아냈다.
그의 젊은 시절의 자화상은 자신감과 야망이 넘치고, 말년의 자화상은 고독과 체념에 잠겨있으면서도 예술적 성숙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그의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1665)은 삶과 죽음, 예술의 본질을 암시하는 상징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자화상의 거장 렘브란트의 말년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아내 사스키아가 사망하며 외로운 상황에서 초상화 작품 <야경>이 혹평을 받으면서 경제적으로도 파산을 한 데다 자식들마저 앞세우면서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1669년 암스테르담의 작은 작업실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작품 <야경>(The Night Watch)은 오늘날 회화적으로 단체 초상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당시 혹평과 불만의 대상이 된 것은 의뢰자의 기대와 예술가의 비전이 일치하지 않은, 다분히 비즈니스 차원의 문제였다.
<야경>은 네덜란드 민병대원 단체를 그린 초상화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귀족 중심의 봉건 사회가 아니라 상공업 중심의 도시 연합체와 유사한 형태의 국가였는데 민병대는 상인, 지주, 전문직 종사자 등 주로 중상류층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방위 조직이었다.
당시 중산층의 시민들은 민병대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사회적 위신과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받는 것으로 자부했으며, 그들은 단체 초상화를 통해 민병대원으로서의 명예를 즐기는 분위기였다. <야경>도 이러한 목적으로 민병대원들이 렘브란트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렘브란트는 <야경>에서 민병대장 프란스 반닝 코크와 중위 빌럼 반 루이텐부르크를 중심으로 총 18명의 민병대원들의 모습을 그렸다. 대원들은 화려한 복장과 무기를 갖추고 있는데, 이는 실제 전투보다는 퍼레이드나 의례용에 가까운 복식과 장비들이다.
렘브란트는 기존의 정적인 단체 초상화와 규격적인 구조를 달리하여, 민병대원들이 행진하는 자연스러운 동적 자세를 그렸다. 또한 이들에게 비치는 빛과 어둠을 활용하여 대원들의 모습을 보다 심미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규격적 포즈와 명암의 효과가 그림 속 일부 인물들을 다른 사람과 겹쳐 가려지게 하거나, 어두운 화면 속에 묻혀 얼굴을 구분하기 어렵게 한 것이 문제가 됐다.
민병대원들은 ‘돈을 냈는데 왜 내 얼굴은 보이지 않느냐”라며 강한 불만을 제기하고 그림을 다시 그려달라는 요구 했다. 렘브란트는 그들의 주장이 예술적 가치에 무지한 때문이라고 믿고 재작(再昨) 요구를 거절했다. 민병대원들은 하는 수없이 그림을 가져다 청사에 걸긴 했다.
1715년 민병대가 해산하면서 <야경>은 암스테르담 시가 관리할 공공자산으로 구분되어 민병대 청사에서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림의 크기가 시청의 문을 통과할 수 없어 시청은 하는 수없이 캔버스의 가장자리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이에 화면 주변의 일부 대원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야경>에 대한 민병대원들의 악평이 귀족 사회에 전해지면서 렘브란트에 대한 그림 주문이 급격히 감소하고 렘브란트는 결국 파산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시청에 걸린 <야경>은 후에 네덜란드 민병대의 활동을 생생하게 묘사한 회화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렘브란트를 네덜란드의 국민화가로 평가하는 근거가 되었다.
렘브란트의〈목욕하는 수산나>(Susanna and the Elders)는 단순한 누드화가 아니라, 구약(외경) 속 인물의 순결과 이에 대한 위협적인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특유의 빛과 어둠을 조화하는 기법으로 그림 속 인물의 내면과 숨소리가 생생히 느껴질 만큼 정교하게 그려낸 걸작이다.
구약 외경 속 수산나는 용모가 아름답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인으로, 정원에서 목욕을 하던 중 두 늙은 재판관의 음모에 휘말린다. 그들은 수산나에게 간음을 하자고 협박하며, 거절하면 거짓 증언으로 그녀를 죽게 만들겠다고 위협한다. 수산나는 “내가 주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깨끗한 몸으로 이들의 모함에 걸려드는 편이 낫겠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각오한 순결을 선택한다.
렘브란트는 이 외경의 장면을 정오가 아닌 어스름한 저녁 분위기로 설정하여 위협과 불안의 감정을 강조했다. 수산나는 왼팔로 가슴을 가리고, 오른손으로 옷깃을 움켜쥐며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는 고대 조각에서 순결을 상징하는 ‘베누스 푸디카’ 자세를 모사한 것이다.
그녀의 시선은 화면 밖을 향해 다급하게 피신처를 찾는 듯하며, 얼굴에는 경건함과 공포가 동시에 담겨 있다. 뒤편의 노인은 수산나의 속옷을 잡아당기고 있고, 또 다른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계단에 기대어 있다. 위선과 간계의 상징이다.
베누스 푸디카(Venus Pudica)는 고대 그리스에서 비너스 여신상을 조각할 때 사용한 양식으로 로마 시대까지도 널리 사용되었다. 라틴어 ‘Pudica‘는 ‘수줍은’, 또는 ‘정숙한’이라는 뜻으로, 여신 비너스가 한 손으로 가슴을, 다른 한 손으로는 국부를 가리는 자세를 말한다. 이 자세는 그리스 조각가 프락시텔레스가 만든〈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작품은 최초의 여성 누드 조각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베누스 푸디카는 이후 르네상스와 19세기 누드 회화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여성 누드의 이상적 표현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도 수산나라는 이름의 여인이 등장한다. 누가복음 8장에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와 다른 여자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수산나가 예수의 활동을 물질적으로 지원한 여성 제자 중의 한 명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예수와 제자들의 여정을 함께하며, 이들을 헌신적으로 섬긴 인물이었다. 수산나(שׁוֹשַׁנָּה)는 히브리어로 ‘백합꽃’을 의미하며, 순결, 아름다움, 신앙적 헌신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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