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드 메디치 – 외교관 화가가 그린 왕비의 자서전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Le_D%C3%A9barquement_de_la_reine_%C3%A0_Marseille,_le_3_novembre_1600_-_Pierre_Paul_Ru.jpg?type=w773 Le Débarquement de la reine à Marseille - Pierre Paul Rubens


루벤스가 1622년경에 394 x 727 cm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루브르 박물관 리슐리외관에 전시되어 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벨기에 출신의 바로크 화가로, 외교관, 인문학자, 귀족으로도 활약했던 팔방미인이었다.


루벤스는 1577년 독일 지겐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종교적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쾰른으로 이주했다. 이후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미술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600년 루벤스는 이탈리아 만토바 공국을 통치한 빈첸초 곤자가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이탈리아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때 베네치아 화풍을 주도한 티치아노, 베로네세, 틴토레토의 색채와 구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로마에서는 유적과 조각을 직접 관찰하며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고전적 조형미에 관해서도 공부했다.


루벤스는 카라바조의 극적인 명암법을 인용하여 종교화, 초상화, 신화화 등을 제작하는 데 열정을 기울였다. 이러한 작업은 그의 바로크 화풍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럽 최고의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루벤스는 화가이면서도 외교관, 인문학자, 언어학자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루벤스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외교관으로서 임명되었다. 그가 성장한 지금의 벨기에(당시 플랑드르)는 당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의 지배를 받던 가톨릭 국가였던 이유로 루벤스는 스페인의 외교관이 된 것이다.


루벤스는 1629년 스페인 왕 필리페 4세의 특명을 받고 영국 런던에 파견되어, 스페인과 영국 사이의 평화 협정을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유럽은 30년 전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고, 플랑드르 지역은 북쪽의 신교도 네덜란드와 오랜 전쟁 중이었다. 이에 헨리 8세 이후 개신교 왕조인 영국(잉글랜드)이 네덜란드를 지원할 가능성이 있어, 스페인은 영국과의 평화가 절실한 실정이었다.


루벤스는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1세의 초상화를 그려주겠다는 명목으로 런던에 입국했지만, 실제 목적은 양국 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기 위함이었다.


루벤스는 그림은 물론이고 라틴어를 포함하여 6개 국어에 능통하고 인문학과 정치에 해박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찰스 1세의 신임을 얻어 왕실의 침실과 서재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찰스 1세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찰스 1세의 궁전인 런던의 화이트홀의 뱅큇팅 하우스(Banqueting House) 천장화로 〈제임스 1세의 신격화(The Apotheosis of James I)를 그려 넣었다. 이는 찰스 1세의 아버지인 제임스 1세가 신의 형상으로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즉 영국 왕가에도 왕권신수설을 부여하여 찰스 1세의 정치적 정당성과 신성함을 상징한 것이다.


또한 그는 〈평화의 알레고리(Allegory of Peace and War)라는 작품을 제작하여 찰스 1세에게 헌정했다. 이 그림은 평화의 여신 팍스가 전쟁의 신 마르스를 밀어내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찰스 1세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640px-Peter_Paul_Rubens_-_Allegory_on_the_Blessings_of_Peace_-_WGA20333.jpg?type=w773 Allegory on the Blessings of Peace - Peter Paul Rubens


루벤스의 진정성에 감동한 찰스 1세는 스페인의 평화 협상 제안을 수용하고, 스페인과 무역을 재개하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며, 네덜란드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결정했다.


루벤스는 스페인-영국 간의 평화협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며, 이의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의 찰스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고, 스페인으로부터도 공로 훈장을 받았다.


루벤스의 그림은 예술의 영역을 넘어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외교적 수단으로 기능한 것으로, 이는 문화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입증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치의 마르세유 입항>은 바로크 미술의 극적인 연출과 정치적 상징이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이다.


이 그림은 그림의 주인공인 프랑스 왕비 마리 드 메디치가 루벤스에게 의뢰하여 제작된 것이다. 마리 드 메디치는 자신의 생애를 그림으로 남기기를 원했고, 이에 루벤스는 24점의 연작으로 이를 그려냈다.


<마리 드 메디치의 마르세유 입항>은 24점의 연작 중 마리 드 메디치가 1600년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결혼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출발하여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하는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마리 드 메디치는 배에서 당당하게 내리고 있고, 그녀를 맞이하는 남성은 푸른 망토에 백합 문양을 두른 ‘프랑스’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하늘에서는 명예의 여신이 황금 나팔을 불며 그녀의 입항을 알리고, 바다에서는 넵투누스와 님프들이 그녀의 도착을 축복하며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누드로 등장한 요정들은 그림 전반에서 루벤스 특유의 관능미와 생동감을 보여준다.


마리 드 메디치는 이름에서와 같이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 귀족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 출신 왕 앙리 4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고, 이후에는 섭정 왕비로서 프랑스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인물이다.


앙리 4세는 개인적으로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왕비와 이혼한 후, 사랑하던 정부 가브리엘 데스트레 마저 잃고 외로운 상황이었다.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내 재정난과 종교적 갈등으로 왕권을 강화하는데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앙리 4세는 낭트 칙령(1598년)을 통해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종교 내전을 종식시키며 프랑스의 평화를 회복하며 명군(明君)으로 평가받기는 했으나, 여전히 가톨릭 극단 주의자들의 반발이 존재하고. 오랜 내전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파탄 상태였다.


앙리 4세의 입장에서는 마리 드 메디치는 재력과 정치력으로 유럽 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메디치 가문 출신임에 따라 충분한 지참금을 가져올 수 있고, 유럽의 왕실과의 외교적 연결고리를 강화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앙리 4세는 재정을 회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유럽 강국들과의 외교적 연대를 확대하기 위해 마리 드 메디치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1600년 마리 드 메디치는 막대한 지참금을 가지고 앙리 4세의 왕비로서 프랑스로 입성했다. 그녀의 지참금은 프랑스 왕정의 재정을 회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앙리 4세는 마리와의 결혼이 정략적 이유에서였기 때문인지, 결혼 초기에는 마리에 대해 큰 애정을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왕실의 전통인 왕비의 대관식을 계속 미뤄왔다.


1610년은 앙리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왕위 계승 분쟁(황제 선출을 두고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이 맞섬)에 개입하여 개신교 제후들을 지원하고, 가톨릭인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을 저지할 목적으로 스페인과의 전면전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왕실의 통합과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그간 미뤄왔던 마리의 왕비 대관식을 준비했다.


5월 13일 마리의 대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5월 14일 앙리 4세는 광신적인 가톨릭 신자 프랑수아 라바약의 단검에 찔려 암살당했다.


F4524_Louvre_Rubens_couronnement_de_Marie_de_Medicis_rwk.jpg?type=w773 Couronnement de Marie de Medicis - Rubens


부르봉 왕가는 앙리 4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루이 13세에게 왕위를 계승했다. 루이 13세는 앙리 4세와 마리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로 당시 8세의 어린이였다. 마리는 루이 13세의 어머니이자 대관식을 치른 선왕의 왕비로서 섭정권을 수임하고 루이 13세를 대신하여 사실상 프랑스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녀는 왕리 4세와 결혼할 때부터 자신을 수행하고 보좌해 온 이탈리아 출신 콘치니를 궁정 내 측근으로 중용하여 국정의 대부분을 운영토록 했다. 콘치니는 국무회의를 주도하고, 리슐리외 추기경 등 고위직 임명권을 독점하며 프랑스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자신은 왕궁인 루브르 궁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프랑스 귀족들은 콘치니의 국정운영에 관해 달갑게 생각지 않았다, 그는 태생적으로 외국인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으며, 마리를 등에 업고 권력을 독점하며 부패 의혹까지 번지면서 대중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특히, 그는 강경한 가톨릭 회복 정책을 구사하여 종교적 분쟁을 심화시켰다.


1614년 13세가 된 루이 13세는 친정을 선언하고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콘치니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1617년 4월 24일 콘치니는 루브르 궁 앞에서 루이 13세의 명령에 따라 근위병들에게 사살되었다. 그의 아내 레오노라도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루이 13세는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도 궁정 정치에서 배제하기 위해 그녀를 루브르 궁정에서 루아르 계곡의 블루아 성으로 사실상 유배시켰다.


그녀는 아들의 결정에 반발하며 귀족들과 반정부 세력을 규합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자신의 고향인 이탈리아와 독일 등지로 망명하며 외교적 복귀를 시도하다 1642년 쾰른에서 사망하며 생을 마감했다.


마리는 생전에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으나 예술 후원자로서는 찬사를 받았다. 마리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루벤스의 연작으로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것이다.


루벤스의 그림은 그녀의 시각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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