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
홀바인이 1536년 오크(나무판)에 유채로 그렸다. 28x20cm의 작은 그림으로 스페인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은 독일 출신으로 16세기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초상 화가다. 그는 역시 화가였던 아버지 한스 홀바인 1세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공부했으며, 영국으로 건너가 헨리 8세의 궁정 화가로 활동하고 왕실과 유럽 지성인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초상화는 인물의 표정, 피부 질감, 복장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정밀하게 묘사했으며, 인물의 성격과 사회적 지위까지를 충분히 표현했다는 점에서 여느 초상화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초상화는 <토마스 모어 초상화>, <에라스무스 초상화>, <대사들>을 꼽을 수 있다.
홀바인은 초기에 독일 문화가 지배적인 스위스 바젤에서 활동하며 종교 개혁과 관련된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때 그는 유럽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문주의자이자 신학자인 에라스무스를 만나게 된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는 1469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는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라틴어 실력과 학문적 재능으로 수도원과 대학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인문주의자들의 왕자’로 불릴 만큼 고전 문헌과 라틴어 문학에 능했으며, 기독교적 인문주의를 주장하며 헬라어(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성경 해석의 정확성을 높였다.
그는 <우신예찬>을 통해 당시 교회와 성직자의 부패를 풍자하고 비판하며 마르틴 루터와 교류하며 종교개혁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나, 신앙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며 칼뱅주의자들의 예정론을 반대하며 개신교로부터도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종교개혁은 인문주의의 이론을 기반으로 중립적이고 온건한 합리적 방식을 전제로 한 것이다.
당시 유럽인들은 에라스무스를 최고의 지성인으로 인식하고 존경했으며, 그들은 서재나 거실에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를 거는 것으로 자신의 지성을 과시하려 했다.
에라스무스는 유럽을 여행하며 여러 도시에서 활동하고, 말년에는 스위스 바젤에 정착했다. 이때 자연스레 홀바인과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홀바인의 재능을 인정하고 자신의 초상화 작업을 서슴없이 허락했다.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무스 초상화는 유럽 전역으로 복제되어 퍼져 나갔고, 이는 동시에 홀바인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홀바인의 재능이 바젤에 제한되는 것이 안타까워 영국(정확히는 당시의 잉글랜드) 왕실에서 법률을 자문하고 있던 토머스 모어에게 추천장을 써주어 헨리 8세의 궁정 화가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토머스 모어 역시 에라스무스에 버금가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지성인이었다. 에라스무스가 잉글랜드에서 활동하던 시절 두 사람은 서로의 사상과 인품을 존경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우신예찬>을 토머스 모어에게 헌정했으며, 토머스 모어는 그의 라틴어 문체와 풍자적 기법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유토피아>에도 이를 반영했다.
런던으로 건너간 홀바인은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서 튜더 왕가 인물들의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이때 그의 작품 <대사들>(The Ambassadors)은 상징과 사실주의가 결합된 홀바인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대사들>은 잉글랜드에 파견된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과 성직자이자 외교관인 그의 친구 조르주 드 셀브를 그린 작품으로, 당시 유럽의 격변하는 시대정신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그림의 왼쪽에 있는 장 드 댕트빌 대사는 담비 털옷과 훈장을 착용한 장 드 댕트빌 대사가, 오른쪽에는 조르주 드 셀브가 있다. 이 두 젊은 지성인의 각각 29세와 25세의 나이는 칼자루와 책에 암호처럼 새겨져 있다.
2단 탁자 위에는 천구의, 해 시계, 수학 도구 등이 놓여 있는데, 이것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과 탐구 정신을 상징한다. 특히 1492년으로 설정된 해 시계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암시하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줄이 끊어진 류트는 가톨릭과 개신교라는 종교적 갈등과 분열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하단 중앙에 일그러진 형태로 그려진 해골은 특정 각도에서만 제대로 보인다. 이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고로써, 인간의 지식과 권력도 결국 죽음 앞에는 덧없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왼쪽 상단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상이 희미하게 등장하는데, 이는 구원과 고난, 그리고 두 대사의 종교적 사명을 암시하고 있다 할 수 있다.
〈헨리 8세의 초상화는 단순한 왕의 얼굴을 넘어서, 최고 권력에 대한 상징 효과를 극대화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헨리 8세는 사각형의 몸통과 넓은 어깨로 화면을 가득 채우며 정신을 응시하고 있다. 이는 절대 권력자로서의 존재감을 강조한 기법이다. 그는 왕관 대신 보석으로 장식된 모자와 옷, 금실 자수, 커다란 벨트 등으로 자신을 치장하여 권위와 부를 과시한다.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얼굴은 냉정하고 통제된 권력자의 이미지를 전달하며,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이 초상화는 단순한 개인의 얼굴을 취미 삼아 그린 것이 아니라 국가적 선전물로 사용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궁정 곳곳에 걸린 것은 물론이고 외국의 사절에게도 주어졌다. 헨리 8세의 신성성과 위엄을 시각적으로 확산시키는 정치적 도구였던 것이다.
홀바인은 이러한 작품을 통해 헨리 8세의 신성성과 위엄을 시각적으로 확산하는 이미지 관리 비서관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 초상화는 헨리 8세의 네 번째 결혼(클레베 앤과의 결혼)을 기념해 제작되었다. 이는 당시 그의 나이 49세라는 문구가 배경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헨리 8세는 잉글랜드의 국왕으로서 뿐만 아니라, 당대의 종교, 정치, 예술의 흐름을 뒤흔든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는 1491년 튜더 왕가에서 태어나 1509년 즉위하여 154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는 재위 중 개신교인 국교회를 창설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6명의 왕비와 결혼하고 그중 2명의 왕비를 처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종교개혁을 시행하고 국교회(Anglican Church)를 창설한 것도 그의 종교적 철학에서 기인하기보다는 자신의 결혼 문제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캐서린 왕비(스페인 남부 아라곤 왕국의 공주)와 결혼했지만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왕위 계승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캐서린 왕비의 시녀인 앤 불린(Anne Boleyn)과 결혼하고자 했지만,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캐서린과의 이혼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교황은 교리상의 이유도 있이지만 캐서린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인 점을 감안하여 사실상 정치적 이유로 헨리 8세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았고, 이에 헨리 8세는 교황청의 혼인 승인권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1534년 헨리 8세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통해 자신을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Supreme Head)으로 선언하고 가톨릭교회와 결별하여 잉글랜드 국교회를 만들었다. 헨리 8세는 교황청이 관할한 잉글랜드 내 수도원을 해산하고, 교회 재산을 자신이 직접 관리했다. 그는 토머스 모어를 국교회에 반대하고 교황청과 내통한다는 혐의로 처형하기도 했다.
헨리 8세는 수장령을 통해 두 번째 왕비로 앤 불린과의 결혼에 성공하고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낳지 못했다. 헨리 8세는 차츰 앤 블린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앤 블린의 시녀인 제인 시모어에게 마음이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는 앤 블린과의 혼인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이번에는 그녀의 불륜을 문제로 삼았다.
그는 앤 불린이 궁정의 여러 참모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특히 친오빠인 조지 불린과도 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왕권을 노린 반역의 의도가 있었다는 혐의를 씌워 런던탑의 타워 그린(Tower Green)에 가두고 프랑스의 검술 전문가를 초빙해 날카로운 검으로 단번에 목을 베개 하여 처형했다. 결혼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헨리 8세는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도 간통 혐의로 처형했다. 캐서린은 앞서 처형당한 왕비 앤 불린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녀는 젊고 활기찬 성격으로 헨리 8세의 노년을 즐겁게 해 주었지만 왕의 시종 토머스 컬페퍼와의 관계가 발각되고, 과거 연인 프란시스 더햄과 약혼하고 동거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왕비의 간통은 단순한 불륜이 아니라 왕권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된다는 당시의 국법에 따라 재판 없이 의회의 결정으로(사권박탈법, Bill of Attainder) 런던탑의 타워 그린에서 도끼로 참수되었다.
앤 불린의 경우 간통 혐의가 정치적 음모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후평이 있으나, 캐서린의 경우는 불륜 혐의가 사실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캐서린은 처형 전날 밤, 목을 내미는 연습을 반복하며 죽음을 준비했으며, '왕비로 죽지만 차라리 컬페퍼의 부인으로 죽고 싶었다'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헨리 8세 이후의 잉글랜드 튜더 왕가의 왕위는 에드워드 6세(1547년-1553년), 메리 1세(1553년-1558년), 엘리자베스 1세(1558년-1603년)로 이어졌다.
에드워드 6세는 헨리 8세와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로 9세에 즉위하여 개신교 개혁을 추진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16세에 사망했다.
메리 1세는 헨리 8세와 첫 번째 왕비 캐서린 사이에서 출생한 딸이다. 그녀는 가톨릭 복원 정책을 펼치며 수백 명의 개신교도를 화형 하여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로 처형당한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녀는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 대한 종교적 관용과 안정된 통치로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시대’를 열었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후계 없이 사망했다.
엘리자베스 1세 사후, 헨리 8세의 여동생 마거릿 튜더의 후손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며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스튜어트 왕조는 이후 후계를 좇아 하노버 왕조,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로 이어졌으며, 작센부르코타 왕조는 1차 세계대전 중 반독일 정서로 왕조의 이름을 ‘윈저(Windsor)’로 변경하고, 조지 5세 이후 엘리자베스 2세와 현재의 찰스 3세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동시에 통치(그레이트브리튼왕국) 하고, 이후 하노버 왕조의 조지 3세 가 아일랜드도 통합하여 현재의 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의 체제를 확립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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