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랭피아 – 고전주의의 도덕적 위선에 도전하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Edouard_Manet_-_Olympia_-_Google_Art_Project_2.jpg?type=w773 Olympia - Edouard Manet


마네의 작품으로 1863년도에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130 x 190 cm 크기로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는 프랑스 근대 회화의 문을 연 혁신적인 화가다. 그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며, 전통과 현대를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세계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이다.


마네는 고전주의와 아카데미 미술의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내용과 표현 방식에서 파격을 시도했다. 그는 현대적 주제를 고전적 구도에 담아, 보는 이에게 불편함과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즐겼다.


그는 쿠르베의 사실주의 영향을 받았지만, 빛과 색채의 표현에서는 인상주의적 접근을 시도했다. 다만 후에 인상주의 작가들이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렸던 것과는 달리, 실내에서 작업한 점에서 모네 등과 같은 인상주의 화가로는 분류되지 않는다. 그는 구성과 형태의 명확한 표현을 위해 근거리 대상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마네는 도시의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사회적 시선, 성적 금기, 도시의 익명성을 담아내며 근대성(modernité)을 추구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살롱의 보수성과 대중의 반응 사이에서 끊임없이 충돌했으며, 예술가의 사회적 위치와 표현의 자유를 확장시킨 인물이라 평가되고 있다.


19세기 당시 살롱(Salon)은 프랑스 화단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출품 전시회로, 프랑스 미술의 권위와 제도, 그리고 예술가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사적 무대였다. 즉 살롱은 왕실이나 국가가 나름의 규범과 형식을 통해 프랑스 미술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제도였다.


살롱은 1667년 루이 14세 시대에 왕립 아카데미가 주관한 공식 미술 전시회였다. 전시회가 루브르 궁전의 살롱 카레(Salon Carré)에서 열렸기 때문에 ‘살롱’이라 불리게 되었다.


화가 개인으로서는 살롱에 입선할 경우 작품의 진가를 인정받아 후원자를 얻을 있고 고가로 작품을 판매할 기회를 갖게 되나, 탈락할 경우에는 무명으로 남아 고독하고 가난한 작가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살롱은 고전주의, 역사화, 종교화, 이상화된 누드 등 전통적 형식과 보수적 주제를 선호했다. 마네와 같은 현실적 묘사나 현대적 주제는 거부당하거나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이에 보수적 고전주의를 거부한 마네, 쿠르베, 모네 등 훗날 사실주의나 인상주의로 분류된 화가들은 살롱의 권위와 편견에 강하게 반발했다.


1863년 나폴레옹 3세는 살롱전에서 거부당한 작품들을 전시할 수 있는 새로운 장으로 낙선전(Salon des Refusés)을 개최토록 명령했다.


1863년 살롱에서는 5,000점 이상의 출품작 중 3,000점 이상이 탈락하며, 예술가들과 언론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도 살롱의 심사 기준의 불공정성과 보수성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나폴레옹 3세는 정치적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대중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 예술 작품이라 하더라도 “국민이 직접 판단하게 하라"라고 지시했다. 이에 살롱에서 탈락한 작품들을 따로 모아 살롱전이 열리는 루브르 근처의 별관에서 ‘낙선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낙선전은 기존의 제도권 내 엘리트 화가 중심의 평가가 아니나 대중이 예술을 평가하는 획기적인 시도로,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 인상주의 화가들이 탄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이는 아방가르드 예술, 표현주의, 큐비니즘 등 다양한 현대 미술 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1874년 모네와 인상주의 화가들이 ‘인상주의 전시회’를 계기로, 화풍과 철학을 같이 하는 화가들의 독립 그룹전 형식이 발전돼 갔다.


마네의 <올랭피아>(Olympia, 1863)는 프랑스 미술사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혁신적인 누드화 중 하나다. 이 작품은 단순한 누드가 아니라, 미술의 전통, 성(性)의 권력, 근대 도시의 시선에 정면으로 도전을 선언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865년 이 작품이 살롱에 출품되자 관계자들과 관람객들은 분노와 조롱을 쏟아냈다. 그들은 “매춘부를 대놓고 그렸다”, “외설적이다”, “예술이 타락했다"라며 마네를 맹렬히 비난했다.


작품 속 나체의 젊은 여인은 침대에 누워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매춘부로 간주했다. 그녀의 이름 ‘올랭피아’는 당시 매춘부들이 즐겨 쓴 예명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여인은 신발을 벗은 채, 목걸이와 팔찌, 꽃장식만을 착용하고 있다. 여인이 성적 대상이며, 사치와 소비의 주체임을 상징한다.


올랭피아의 뒤로는 검은 하녀가 꽃다발을 들고 등장하는데, 꽃다발은 올랭피아에게 어느 남성 고객이 보낸 선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침대 끝에는 검은 고양이가 앉아있다. 고전적 누드화에서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의 고양이가 등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마네는 이 작품에서 비너스나 천사가 아닌 현실적 여성의 적나라한 육체를 정면에 배치하여 고전주의가 추구한 미술의 위선을 폭로한 것이었다.



%C3%89douard_Manet_-_Le_D%C3%A9jeuner_sur_l%27herbe.jpg?type=w773 Le Déjeuner sur l'herbe - Édouard Manet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Le Déjeuner sur l’herbe, 1863)는 살롱에서 배제되어 낙선전에 전시된 작품이다. 이 작품도 당시 미술계에 큰 충격을 주며 논란을 일으켰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옷을 입은 두 남성과 한 명의 나체 여성이 숲 속에서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논란의 핵심은 나체 여성이 신화적 존재가 아닌 현실의 인물로 표현되었고, 남성들과의 관계가 특정되지 않아 성적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작품에 등장한 나체의 여인 또한 <올랭피아>에 등장한 여인과 동일한 인물로 그녀는 실제로 마네의 친구이자 예술가라 알려졌다.


미술적 기법에서도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전통적인 원근법과 명암을 무시하고, 평면적이고 강렬한 색채로 구성하여, 당시 아카데미 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올랭피아>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 등장하는 여성의 누드는 이전 고전주의 화파들의 그려낸 여성의 누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대중의 비난과 공격에 맞서야 했던 이유는 단지 그림 속의 누드 여성이 신화 속의 여신이나 종교적 성녀(聖女)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고전주의라는 이상으로 포장된 귀족들의 위선이 가져온 사회적 편견이 예술의 세계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마네는 ‘비너스’나 ‘푸쉬케’ 대신 ‘올랭피아’를 동원하여 당시 대중들의 위선의 가면을 벗기고, 현대미술의 문을 여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작성자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나 배포를 금합니다.>




이전 23화샘 – 사실주의 미술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