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
들라크루아가 1827년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342 x 496 cm의 대작으로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에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1798년 프랑스 샤랑통 생모리스에서 출생하여 186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적인 거장으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히오스섬의 학살>(1824),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알제의 여인들>(1834) 등 시대의 격동을 시각화하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들은 이전 신고전주의의 이성과 질서를 뛰어넘어 격정, 고통, 자유, 저항과 같은 인간의 내면을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인 구도로 표현했다.
그는 1832년 모로코를 방문하고, 북아프리카의 풍경과 인물들을 다룬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는 미술사에서 오리엔탈리즘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는 셰익스피어, 괴테, 바이런 등의 문학작품을 석판화로 남겼으며, 예술에 대한 깊은 사유를 일기와 편지로 기록한 철학적 예술가였다.
프랑스 미술사는 들라크루아를 신고전주의의 대표 화가 앵그르와 비교 평가하곤 한다. 두 사람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인문학적 사상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 다만, 앵그르가 선과 형태의 완벽함을 추구했다면, 들라크루아는 색채와 감정의 폭발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표현의 방식이 극적으로 대비된다. 두 사람은 명실공히 프랑스 미술사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다.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퍼진 예술 사조로서, 이성과 질서를 중시하던 계몽주의와 신고전주의를 거부하고 감정과 상상력,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를 추구한 문화적 혁명이었다.
낭만주의는 이성보다 직관과 영감을 중시하여, 눈물, 격정, 고독과 같은 인간 본연의 감정을 예술의 중심 소재로 삼았다. 이러한 감정은 보편적 규범보다는 개인의 내면과 개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예술의 출발점이 되었다.
또한, 폭풍, 황혼, 숲, 바다와 같은 자연의 신비를 경외하고, 현실보다 이상향이나 신비로운 동양의 세계를 동경하여, 중세 기사의 무용담이나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 혁명, 해방, 자유의 사상을 그려내, 예술을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들라크루아 낭만주의 회화의 정점이자, 죽음, 쾌락, 파괴, 광기가 뒤엉킨 미학의 극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는 고대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사르다나팔루스의 전설을 바탕으로, 패배한 왕이 자신의 궁전과 애첩, 보물, 말까지 모두 것을 파괴한 뒤 자결하는 순간을 그려낸 것이다.
왕은 침대에 느긋하게 누워, 무표정한 얼굴로 학살과 파괴를 관조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도 절망과 향락을 동시에 목도하는 초연한 태도가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병사들은 애첩과 하인, 말을 학살하고, 여인들은 절규하거나 자살하는 등 관능과 폭력이 결합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화면 전체는 붉은 피와 금빛 사치가 강렬하게 혼합되어 명암 속에 존재한다.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을 통해 영웅적 승리보다 패배와 자기 파괴라는 비극을 격렬한 색채의 폭발로 흡사 아름다운 충격처럼 그려냈다. 동시에 잔혹함과 미개함의 주체를 동양(인)으로 설정하여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반영하고 있다.
사르다나팔루스는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이 기록한 전설적 인물이다. 그는 종종 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왕으로 묘사된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전설은 그리스 작가 크테시아스와 디오도로스 시클루스의 기록으로 전해졌으며, 영국 시인 바이런은 이를 희곡 <Sardanapalus>(1821)로 재구성했다. 들라크루아는 이를 바탕으로 낭만주의가 추구한 감정의 극단, 파멸의 미학, 권력의 허무함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낭만주의는 단순히 ’감성적인 예술‘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해방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한 혁명적 사고에서 탄생된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또 다른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1830)은 낭만주의적 시각에서 프랑스혁명의 자유주의 사상을 극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는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졌으며, 왕정에 저항한 민중의 분노와 희생, 그리고 자유에 대한 열망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1830년 7월 혁명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에 이어 두 번째로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시민 정신을 일깨운 사건이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으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은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정면으로 저격했다. 이에 루이 16세 왕은 헌법을 제정하고 자신의 권한을 최소화했지만, 이는 혁명세력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1792년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등이 자코뱅당을 중심으로 제1공화국을 수립하고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시키며 왕정을 폐지했다. 그러나 자코뱅당의 제1공화국은 구체제의 잔재를 제거한다는 명분하에 지나친 공포정치를 시행하다 반격을 받아, 자신들이 만든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을 맞고 말았다.
1795년 제1공화국이 만든 혼란을 수습코자 집단지도체제(총재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혼란만 가중하고 있는 틈을 타 1799년 나폴레옹이 군대를 동원해 총재정부를 해산하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정국의 혼란을 수습한 나폴레옹 통령은 1804년 프랑스가 제국(제1제정) 임을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의 왕관을 썼다.
1814년 주변 열강의 군사적 도전과 정치적 압박에 굴복한 나폴레옹 황제는 황제의 관을 내려놓고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나고, 민중들은 그간 영국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연명하고 있던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를 왕으로 추대(왕정복고) 했다.
루이 18세는 헌장(Charte Constitutionnelle)을 선포하고 입헌군주제를 표방했지만 지나친 비만과 통풍으로 루브르 궁전에서 사망하고, 1824년 그의 동생 샤를 10세가 후왕으로 즉위했다.
샤를 10세는 루이 18세의 입헌군주제보다는 루이 16세의 전성기와 같은 절대주의를 희망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등 구체제로의 복귀를 시도했다. 이에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830년 7월 26일, 샤를 10세가 ‘7월 칙령’을 발표하며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검열하자, 시민들의 저항이 폭발했다. 이것이 7월 혁명이다.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은 단 3일(Trois Glorieuses) 간의 격렬한 투쟁으로 절대왕정의 종말을 알리고, 시민의 힘으로 왕을 바꾼 역사적 사건이었다. 자유주의와 민중의 정치 참여에 대한 갈망이 폭발한 순간이었다.
혁명의 첫날, 인쇄공과 기자들이 거리로 나서며 시위를 시작하고, 학생, 노동자, 상인들이 이에 합류했다.
둘째 날에는 파리 전역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시민군과 왕실군이 격돌했다.
셋째 날, 튈르리 궁전과 노트르담 대성당이 시민군에 점령되고, 샤를 10세는 퇴위를 선언한 후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혁명의 결과는 공화정이 아닌 입헌군주제가 선택되었고, 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필리프가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삼색기를 프랑스 국기로 채택하고, 언론과 집회 자유를 확대했지만, 여전히 부유층 중심의 정치가 유지되었다. 노동자와 빈민은 기대했던 개혁을 얻지 못했고, 이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되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자유의 여신은 그림 한복판에서 가슴을 드러낸 채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한 손엔 삼색기를 다른 손에는 총검을 들고 전진하고 있다.
민중들과 실크 모자를 쓴 부르주아, 학생, 소년 병사 등 다양한 계층이 그녀를 뒤따라 전진하며 함께 싸우고 있다.
배경의 바리케이드, 시체, 피 묻은 얼굴 등은 혁명의 대가와 현실을 보여주며, 낭만주의 특유의 극적인 감정 표현이 돋보인다.
멀리 보이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삼색기는 혁명의 전국적 확산을 암시하고 있다.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 공화국의 상징인 ‘마리안느’(Marianne)로 해석되고 있다. 마리안느는 시민들이 추구한 ‘자유’ 그 자체를 의인화한 존재로,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혁명의 핵심 가치를 대표하며, 프랑스 국민의 정신적 얼굴이라 할 수 있다.
마리안느는 1792년 제1공화국 수립 이후 등장했다. 마리안느라는 이름은 ‘Marie’와 ‘Anne’이라는 평범한 프랑스 여성의 이름을 합친 것으로, 민중 속의 보통 여성을 상징한다. 왕이나 귀족이 아닌 민중의 자유와 공화정의 수호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녀가 쓰고 있는 프리기아 모자는 고대 로마에서 노예 해방의 상징으로 쓰였던 모자로, 당시부터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녀는 프랑스혁명을 상징하는 파랑, 흰색, 빨강의 삼색기를 들거나 삼색으로 표현된다.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을 발표하며 “나는 혁명가는 아니지만, 붓을 들고 이 혁명의 역사에 참여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을 통해 혁명에 참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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