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몬드리안이 1937년 파리에서 유화로 그렸다. 75 × 60.5 cm 크기로 파리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다.
작품은 몬드리안의 전형적인 수직, 수평의 검은 선으로 구성돼 있으며, 선들은 단순한 윤곽선이 아니라, 면을 구성하는 하나의 평면 요소로 기능한다. 검은 선들의 간격과 두께가 화면의 리듬을 만들고, 특히 상단의 넓은 흰색 면은 ‘상승감’을 준다.
색채는 작품의 제목과 같이 빨강, 파랑, 흰색의 삼원색만을 최소한으로 사용하여 보편적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구도는 대칭을 피하고, 큰 빨간 면, 작은 파란 면, 넓은 흰색 면이 서로 긴장과 균형을 이루도록 배치되어, 비대칭의 ‘동적 균형(dynamic equilibrium)’을 이루고 있다.
피에트 몬드리안은 1872년 3월 7일 네덜란드 아메르스포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이자 아마추어 화가였고 삼촌도 헤이그파 화가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그림과 매우 친숙하게 자랐다.
그는 14세부터 본격적으로 드로잉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가족의 권유로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결국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학교(Rijksakademie)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당시 그는 풍경화, 농촌 장면, 종교적 분위기가 강한 전통적 양식의 그림으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00년대에 들어 그는 자연을 단순화하는 실험을 시작하며, 추상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그는 신지학(Theosophy)의 영향을 받아 자연의 본질적 구조를 찾으려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신지학이란 19세기 후반 헬레나 블라바츠키가 창시한 영적 · 철학적 사상 체계를 말한다. 신지학은 모든 종교, 철학, 과학에는 공통된 진리가 있다는 믿음으로, 이 진리는 연구와 명상을 통해 접근할 수 있으며, 인간은 더 높은 영적 단계로 진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신지학의 사상은 세상 만물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더 깊은 구조와 질서가 있으며, 모든 생명은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몬드리안은 자연을 그대로 그리는 대신 최대한 단순화하여 그 본질적 구조(수직, 수평, 균형, 기본색 등)를 찾으려 했고, 이것이 바로 그의 네오플라스티시즘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몬드리안은 1912년 파리로 이주하며 큐비즘(입체파)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초심자의 심정으로 새로운 미술 세계의 일원이 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자신의 성 몬드리안의 네덜란드식 철자 Mondriaan에서 a를 하나 빼고 영어식으로 Mondrian으로 바꾸는 자기 혁신을 감행했다.
그는 파리로 가기 전에 약혼한 상태였지만 파리로 떠나면서 약혼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오직 예술에만 전념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배우자는 오직 예술뿐이었다.
1917년 그는 테오 판 되스부르흐와 함께 데 스틸 운동을 창립했다. 그는 여기서 그의 대표적 이론인 네오플라스티시즘(신조형주의)을 정립했다.
그의 네오플라스티시즘은 예술이란 감정이나 자연의 모방의 수단을 넘어서 보편적 조형 질서를 찾는 작업이라는 사상을 말한다. 이에 따라 네오플라스티시즘은 몇 가지 원칙을 주장했다.
첫째, 형태를 완전히 해체하여 오직 수직선과 수평선만 남기고,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으로 단순화한다. 곡선, 대각선, 자연적 형태는 허용하지 않는다.
둘째, 색채는 기본색인 빨강, 노랑, 파랑의 삼원색과 검정, 흰색, 회색의 무채색만을 사용한다.
셋째, 구성은 서로 다른 크기의 면과 선을 조합해 긴장감과 조화가 공존하는 비대칭적 균형을 지향한다.
이러한 원칙은 그대로 데 스틸(De Stijl) 운동의 핵심 이론이 되었다.
데 스틸은 1917년 네덜란드의 일부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결성한 그룹으로, 영어로는 ‘The Style’(그 양식)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사회적 정신적 질서를 만들자는 개념에서 예술을 통해 새롭고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원칙은 몬드리안의 네오플라스티즘의 원칙과 대동소이하나, 이들의 대상은 회화에만 국한하지 않고 건축, 가구,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등 건축과 예술의 전반에 대한 것이었다.
데 스틸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는 가구에서는 리트펠트의 적·청 의자와 건축에서는 리트펠트 슈뢰더 하우스를 꼽을 수 있다.
1940년대 초 몬드리안은 2차 대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뉴욕에서 재즈와 부기우기 리듬에 매료되어 그의 그림에 검은 선이 사라지고 색 띠들이 도시의 리듬처럼 움직이는 보다 자유롭고 활기찬 추상을 추구했다. 대표작으로는〈브로드웨이 부기우기>가 있다. 그는 실제로 재즈를 배우고 춤을 즐겨했다.
1944년 2월 1일 몬드리안은 뉴욕에서 향년 71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 <Victory Boogie Woogie>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몬드리안은 결혼하지 않고 직계 가족도 없어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작품들은 주로 친구들, 컬렉터들, 그리고 미술관들이 정리하고 관리하게 되었다.
특히, 그의 생전에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슬레이퍼(Sal Slijper)와 알버트 판 덴 브리엘은 1919년 몬드리안이 파리로 떠날 때 그가 남겨둔 작품들을 모두 구매하고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사들여 가장 큰 개인 컬렉션을 형성한 것을 후에 네덜란드 헤이그의 쿤스트뮤지엄 덴하흐(Kunstmuseum Den Haag)에 모두 기증했다.
이런 이유로 쿤스트뮤지엄 덴하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인 300여 점의 몬드리안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그의 유작〈Victory Boogie Woogie>도 이곳에 있다.
이 외에도 뉴욕 MoMA (Museum of Modern Art), 파리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 등도 기증 등을 통해 몬드리안의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몬드리안은 곧고 바른 선과 면으로 우주의 진리를 추적한 비대칭의 완벽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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