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본명 모이셰 샤할로비치 샤갈)은 1887년 러시아 제국 비테프스크(현재 벨라루스)의 작은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샤갈의 부모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하게 살며 지방 정부의 차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어린이들에게 유대의 전통과 종교적 의식을 철저히 교육했다.
샤갈도 유대인의 전통과 역사를 배우며 종교적 이념에 충실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훗날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바이올린 연주자, 염소, 닭, 공중에 떠 있는 연인, 푸른 밤 등의 소재는 어린 시절의 일상의 기억을 재현한 것으로, 그의 일생에서 고향은 삶의 원천이었으며, 동시에 잃어버린 낙원이기도 했다.
그는 유대인 학교(헤데르)와 러시아 공립학교에서 기초적인 드로잉을 배우고, 비테프스크 지역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던 화가 예후다 펜(Jehuda Pen)의 화실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샤갈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하여 당대 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진보적 화가 레온 박스트가 운영하고 있던 Zvantseva School of Drawing and Painting에 입학하여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1911년 24세의 샤갈은 보다 넓은 미술 세계를 찾아 파리로 이주하여 사설 아카데미에 등록하고 그림 공부를 계속하며, 당시 파리를 휩쓸고 있던 입체파, 야수파, 표현주의 등 다양한 화풍을 경험하며 진보적 미술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중까지도 특정의 유파에 자신을 구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하고 자유로운 화풍을 개척해 나갔다. 그는 “나는 내 꿈을 내 방식으로 그릴뿐이다”라는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며, 자신의 미술 세계를 색채의 해방, 자유로운 구성, 시적 상징으로 규정해 갔다.
샤갈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그의 첫 번째 아내 벨라 로젠펠트였다.
그녀는 비테프스크에서 보석상을 운영하는 부유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 지적이고 세련된 여성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에게 유대교의 신앙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세속적 교양을 쌓도록 교육했다. 그녀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고, 신문에 글을 기고할 정도로 문필 능력도 뛰어났다.
1909년 벨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친구를 방문했다가 샤갈을 만났고,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벨라 부모는 샤갈의 가정이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샤갈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두 사람은 1915년 결혼하고 딸 이다를 낳았다.
샤갈은 벨라를 모델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에서 벨라는 단순한 모델이 아니라 사랑, 순수, 희망, 고향의 상징이기도 했다. 샤갈은 <생일>, <Bella with White Collar> 등에서 벨라를 하늘을 나는 천사와 같이 빛나는 존재로 그렸다.
벨라는 작가로서 글쓰기를 계속하며 샤갈의 지적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샤갈과의 사랑을 회고한 자서전 <First Encounter>를 출간했다.
1941년 유대인 샤갈은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된 직후, 미국 정부와 바리안 프라이 등 구호단체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의 샤갈은 단순한 ‘망명자’가 아니라, 예술적 전환점을 맞이한 시기였다.
미국에서의 샤갈의 작품은 이전보다 훨씬 어둡고 고통스러운 분위기를 띠기 시작했다. 유대인 박해와 전쟁의 참상을 성서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이 시기 그의 대표작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소재로 하였다. 유대인 샤갈은 기독교의 교리와는 달리 예수를 '유대인의 고통을 상징하는 순교자'로 그렸다.
샤갈은 미국 생활 중 1937년부터 그리던 대작 <Revolution>을 다시 손보고, 1943년에는 이 작품을 세 개의 독립된 그림으로 잘라 재구성했다.
아울러 샤갈은 뉴욕의 유대인 예술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전시에 참여하는 등 뉴욕 모더니즘 미술의 한 축으로 받아들여졌다.
1944년 그는 미국 체류 중 가장 슬픔을 겪게 된다. 아내 벨라가 세균 감염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그의 예술과 삶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후 작품들에 슬픔과 상실의 정서가 강하게 배어들었다.
1948년 샤갈은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프랑스는 그의 예술적 고향이자 정서적 안식처였다.
그는 프랑스 남부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며 스테인드글라스, 오페라 하우스 천장화 등 빛과 색의 예술에 몰두했다. 이 시기는 그의 예술이 ‘빛’과 ‘색채’로 절정에 이르는 시기였다.
그의 말년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은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천장화다. 이는 프랑스 문화부장관 말로가 샤갈에게 직접 의뢰한 것으로, 샤갈은 모차르트, 드뷔시, 라벨, 차이콥스키 등 14명의 작곡가가 만든 오페라의 장면들을 천장에 묘사했다. 이는 샤갈이 현대의 위대한 ‘색채 화가’라는 평가를 굳힌 결정적 작업이 되었다.
그의 ‘빛의 예술’은 프랑스의 랭스(Reims) 대성당, 메츠(Metz) 대성당 등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뉴욕 유엔 본부의 '평화의 창' 제작을 통해 정점을 찍었다. 예루살렘 하다사 병원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창문’도 그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말년을 대표하는 또 다른 대작업으로는 <성서 메시지>(Message Biblique)라는 제목의 연작이 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창세기, 출애굽기, 아가서 등 성서의 이야기와 상징적 메시지를 강렬한 색채로 담아냈다.
샤갈은 1966년 <성서 메시지>를 완성하고 이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작품을 인수한 당시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는 이 작품을 보존할 전용 미술관을 짓기로 결정했다. 말로의 결정에 따라 니스 시가 미술관 건립에 필요한 부지를 제공하여 니스에 ‘샤갈 성서 미술관’(Musée National Message Biblique Marc Chagall)이 건립되게 되었다.
샤갈은 강렬한 태양이 빛나는 니스를 사랑하여 니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성서 미술관 건립 과정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미술관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 등을 구상하여 제안하고 일부는 자신이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1973년 샤갈 성서 미술관 개관식에는 샤갈이 직접 참석했다. 이는 예술가가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위한 국립미술관 개관식에 참석한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1974년 그는 <Four Seasons>라는 모자이크화로 세계 최대 규모의 공공 미술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미국 시카고의 Chase Tower Plaza에 제작된 것으로, 길이 21m, 높이 4.3m, 폭 3m의 거대한 4면 모자이크화다. 작품에는 샤갈이 그의 작품에서 즐겨 그린 새, 물고기, 꽃, 태양, 연인들과 러시아 유대인 문화의 상징들이 망라하여 등장한다.
샤갈은 프랑스에서 <Four Seasons>의 밑그림을 제작했으며, 시카고 시정부는 이에 맞춰 모자이크 타일로 작품을 완성했다.
1985년 3월 28일 97세의 샤갈은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생폴드방스(Saint-Paul-de-Vence)에서 기력을 다하고 평온히 잠들었다.
샤갈은 평화와 사랑을 색채와 빛으로 노래한 모더니스트이자 로맨티시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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