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바실리 칸딘스키(Vassily Kandinsky)는 ‘추상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며, 색채에 음악을 결합해 새로운 예술 세계를 열어간 인물이다.
칸딘스키는 ‘대상물이 그림을 손상시킨다’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그림에서 대상을 배제한 순수 추상화를 발전시켰다.
음악을 좋아한 그는 특히 바그너의 오페라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추상화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음악을 들으며 색을 보는 공감각적 경험을 하고, 작품에 ‘구성(Composition)’, ‘즉흥(Improvization)’ 등과 같은 음악적 제목을 붙여 넣었다. 그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마치 작곡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작업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과 경험을 반영한 작품이 <Composition> 연작이다. 그는 1907년의 <Composition I>부터 1939년 <Composition X>을 완성하기까지 수십 년의 기간 동안 음악을 보고 미술을 듣는 공감각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표현했다.
그는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30세에야 미술로 전향했다.
독일 뮌헨에서 공부하며 프란츠 마르크, 가브리엘레 뮌터 등과 공동으로 표현주의 그룹인 청기사파(Blue Rider)를 창립했다. 이들은 기존 미술 제도와 보수적 전통에 반발하며 색채와 형태를 중시하고 추상성과 정신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다.
칸딘스키는 예술이 단순한 모사나 재현이 아니라 영적이고 내적인 세계를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색과 형태는 감정과 정신을 직접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역설했다.
청기사파 활동은 그가 추상미술을 개척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때의 작품으로는 <The Blue Rider>가 있다.
칸딘스키는 이후 바우하우스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에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립한 혁신적인 예술·디자인 학교로,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출발점이 된 기관이다. 독일어 Bauhaus는 ‘건축의 집’을 뜻하는 것으로, 바우하우스는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은 모두 공예가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순수미술과 공예를 결합해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만들어 최종적으로는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예술을 통합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양식은 단순함과 기능, 기하학적 형태를 강조하는 디자인으로 현대 건축양식, 산업 디자인, 가구, 타이포그래피 등 현대 디자인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바이마르와 데사우에 있는 바우하우스 건물은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바우하우스는 근거지를 바이마르-데사우-베를린으로 옮기며 자신들의 철학에 따른 청사를 건축했다)
1933년 나치는 바우하우스가 사회주의적 성향으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참여자를 해산시키고 기관을 폐쇄했다.
바우하우스의 폐쇄는 이에 참여한 교사와 학생들이 미국 등으로 망명하면서 바우하우스의 사상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바우하우스는 오늘날까지도 “모던 디자인의 원형”으로 불리며,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의 영원한 교과서로 평가되고 있다.
칸딘스키가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는 <Several Circles>이 있다. 이 작품은 원(circle)이라는 단일 형태만으로 색채, 질량, 배치 등의 관계를 탐구한 대표적인 기하학적 추상 작품이다.
이 시기 그의 또 다른 작품으로는 <On White II>가 있다. 이는 삶과 죽음, 기회의 상징을 색채와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했다. 칸딘스키에게 있어 흰색으로 무한한 가능성과 영적 공간을 상징하며, 검은 선과 형태는 긴장, 죽음, 침묵을 상징한다. 기하학적 요소들은 감정의 리듬과 정신적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다.
1933년 나치가 바우하우스를 폐쇄하면서 칸딘스키는 독일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하고, 1939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며 러시아 출신이 아닌 프랑스 화가로 불리게 되었다.
파리에서 그는 앙리 마티스, 피에트 몬드리안, 장 아르프 등과 교류하며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심인물로 꼽히게 되었다.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칸딘스키의 추상화가 초현실주의와 생물학적 이미지와 연결되어 해석되기도 했다.
그의 프랑스 시절은 독일에서의 기하학적이고 구조적인 추상에서 벗어나 보다 유기적이고 생물학적인 형태를 탐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프랑스 작품에서는 부드러운 곡선, 세포나 미생물 같은 형상이 자주 등장하며, 이전보다 색채가 한층 밝고 자유로워졌다.
대표작으로는 <Composition IX>와 <Composition X> 등이 있으며, 이는 그의 프랑스 후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프랑스에서 겪어야 했던 2차 세계대전의 긴장 속에서도 창작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 파리 근교 뇌이 쉬르 센(Neuilly-sur-Seine)에서 생활하다 1944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칸딘스키는 부르주아 출신으로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음악과 여행을 즐기고, 지적 교류를 통해 삶의 풍요를 추구했다. 그는 예술을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소명에 다하는 일종의 의식처럼 여기기도 했다.
그는 예술적 열정과 가정적 삶의 현실에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는 1892년 아냐 치미아키나(Anja Chimiakina)와 결혼했으나 그녀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성격으로 갈등을 겪게 되었으며, 결국은 청기사의 멤버로 동료 화가인 가브리엘레 뮌터와 10여 년간 동거하며 예술적 열정을 함께했다.
부인 아냐와는 1911년 정식 이혼하고, 1917년 니나 안드레예브스카야와 재혼하여 말년까지 함께했다.
현재 칸딘스키의 작품은 렌바흐하우스 미술관 (Lenbachhaus, 뮌헨), 구겐하임 미술관 (Guggenheim, 뉴욕),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Centre Pompidou, 파리), 모마(MoMA, 뉴욕 현대미술관)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널리 산재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렌바흐하우스 미술관은 칸딘스키의 최대 컬렉션으로, 이는 뮌헨이 그의 청기사파의 중심지였고, 특히 그와 청기사파를 같이 하고 동거도 한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가 그의 초기 작품을 대량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렌바흐하우스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미국 등 해외의 많은 미술관이 칸딘스키의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경위는, 바우하우스 폐쇄 시 나치가 몰수한 그의 작품이 다양한 경로로 이전되고, 또한 그는 생전에도 유명세를 얻어, 해외 주요 미술관이나 수집가가 앞다투어 그의 그림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음악과 미술을 함께하고, 예술과 가정을 공유한 융합형 인간이었다. 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의 작품에 공감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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