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 요절한 천재는 결코 퇴폐를 그리지 않았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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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Self-Portrait with Physalis)은 에곤 쉴레가 22살 때인 1912년에 그린 자화상이다. 40 × 33 cm 크기로 현재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트 미술관(Leopold Museum)에 있다.


쉴레는 작품에서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화면 밖으로 잘라내듯 배치해, 불안정하고 긴장된 구도를 만들었다. 그의 눈빛은 불만과 불안이 가득한 채로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불안과 저항을 상징한다.


화면 왼쪽의 붉은 꽈리 열매(Physalis)는 생명과 죽음, 성적 긴장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쉴레의 길지 않은 예술 세계 전반을 지배한 주제 의식이었다.


쉴레는 긁어 문지른 듯한 붓질로 자신의 피부를 거칠고 투박하게 색칠했다. 시대적 불안과 상존하는 공포감을 표현하고 있다.


에곤 쉴레(Egon Schiele)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대표 화가로, 왜곡된 인체와 강렬한 감정 표현을 통해 인간 내면의 불안과 욕망을 표현했다.


그는 1890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 도나우강변의 작은 정원 마을 툴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돌프 쉴레는 오스트리아 연방 철도의 역장이었으나 매독에 걸려 정신적 혼란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가 14세 때 사망했다. 어머니 마리는 체코 출신으로 엄격하고 단호한 여성으로 쉴레에게 큰 애정을 주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쉴레의 환경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가족의 생계는 누이 멜라니의 손에 의존했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으며, 쉴레는 세 명의 여동생 중 막내 게르트루트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 둘의 관계는 너무 밀접해서 주변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 가난, 가족 간의 갈등,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은 나중까지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그의 작품 속에 뒤틀린 인체, 성적 긴장, 고독과 죽음의 주제로 재현되었다.


쉴레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차에 매료되어 몇 시간씩 기차를 그리며 보냈다. 아버지는 그의 그림이 학업을 방해한다고 생각해 스케치북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특출한 재능을 말리지는 못했다.


1906년 16세의 그 빈 미술 아카데미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당시 빈 미술 아카데미(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Wien)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고의 미술학교로 웬만한 재능으로는 쳐다보지도 못하는 학교였다.


쉴레를 담당한 크리스티안 교수는 극도로 보수적인 인물로, 전통적이고 엄격한 아카데미즘을 강조했다. 그는 쉴레의 자유로운 창의적 욕구를 허용하지 않았다.


1907년 쉴레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찾아가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며 예술적 포부를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이는 쉴레의 예술 여정에 큰 전환점을 만들었다.


클림트는 쉴레보다 28세 연상으로, 이미 빈 분리파(Secession)의 창립자이자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오스트리아 화단의 거장이었다.


클림트는 쉴레의 재능을 금세 알아채고 그의 작품을 사주고, 모델을 소개하며 후원자들과도 연결해 주었다. 일종의 후견인이 되어준 것이다.


클림트의 응원에 고무된 쉴레는 1909년 뜻을 같이하는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빈 미술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노이쿤스트그루페’(New Art Group)을 결성하여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쉴레의 ‘노이쿤스트그루페’는 “새로운 예술은 과거와 전통을 답습하지 않고 자기 안에서 창조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라고 선언하고, 1909년 말 빈에서 첫 그룹 전시회를 개최하고, 다음 해에 프라하에서 두 번째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시회는 쉴레의 새로운 미술을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나,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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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쉴레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고, 그의 작품은 뭉크, 반 고흐 등 국제적 작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되었다. 전시회에서 그의 누드화와 자화상은 새로운 미술을 기대한 관객들과 화단에 큰 충격을 주며 엇갈린 평가를 얻었다. 그의 작품은 빈 분리파의 ‘자유로운 예술’ 정신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쉴레는 차츰 빈 분리파에서 클림트의 후계자로 불리며 ‘예술의 자유’를 주창한 클림트의 정신을 계승하고 확장해 나아갔다. 그는 클림트가 사망한 직후 개최된 1918년 분리파 전시회에 50여 점을 출품하며 빈 분리파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쉴레는 드로잉의 천재이자 자화상의 대가였다.


그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약 2,500~3,000점의 드로잉과 수채화를 남겼다. 드로잉은 그의 자유로운 예술 세계를 마음껏 표현하고 발산한 최고의 수단이었다.


그의 드로잉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그는 빠른 속도의 몇 개의 선으로 인체의 긴장과 불안, 욕망을 강렬하게 드러냈다. 그의 선은 매우 날카롭고 직접적이었다. 인체를 왜곡하고 과장된 포즈를 통해 내면 심리를 시각화하는 독창적 기법을 확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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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_Schiele_-_Self-Portrait_as_St._Sebastian.jpg?type=w773 Egon Schiele - Self-Portrait as St. Sebastian



쉴레는 100점 이상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는 동시대 작가들과 비교할 때 매우 이례적이었다. 쉴레가 자화상에 집착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극도의 애착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자화상은 상시적으로 엄습하고 있는 불안, 고독,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자기 탐구의 한 방법이다. 어쩌면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요절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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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쉴레는 당시 17세였던 발리 노이질을 만나 동거하며 그녀를 모델로 삼아 다수의 드로잉과 채색화를 그리며 그의 표현주의적 화풍을 다듬어 갔다. 그가 발리를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는 〈발리의 초상〉, 〈검은 스타킹을 신은 발리〉, 〈붉은 블라우스를 입은 발리〉 등이 있다.


어린 발리는 쉴레를 끔찍이 사랑하고 기꺼이 그의 예술적 동지가 되어주었다. 쉴레가 돈이 필요하면 발리는 빈으로 가 직접 쉴레의 그림을 팔아 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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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쉴레는 체코의 작은 마을 체스키크룸로프에서 발리와 함께 지내며 그림을 그렸다. 그때 그는 마을의 소녀들을 모델로 삼아 누드 드로잉을 제작했는데, 이는 당시에도 불법적인 행위였다. 어느 날 마을 주민들은 쉴레의 이 같은 활동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쉴레의 아틀리에를 급습하여 수백 점의 드로잉을 압수하고 그중 일부는 ‘외설’이라는 이유로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그를 미성년자 유인 및 외설물 제작 혐의로 체포했다.


재판에서 그는 미성년자 유인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외설적 그림을 미성년자에게 보여준 혐의로 유죄가 인정되어 24일간 구금되었다. 이 사건은 쉴레를 사회적으로 ‘위험한 예술가’라는 낙인을 찍었으나, 한편으로는 쉴레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감 생활의 경험은 쉴레의 감정적 불안정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가 감옥에서 겪어야 했던 극심한 죄책감, 고립감, 공포감 등은 그의 작품 〈감옥에서의 자화상〉, 〈죄수〉 등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쉴레의 수감에도 불구하고 발리는 그의 진정성을 지지하고, 감옥 창문으로 오렌지를 넣어주며 쉴레를 보살폈다. 석방 후 쉴레는 이를 소재로 〈오렌지만이 유일한 빛이었다〉라는 수채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쉴레와 발리와의 애틋한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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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쉴레는 빈 교외의 부유한 집안 출신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을 결심하고 발리에게 이별을 요구했다. 쉴레는 하름스의 지원을 받아 경제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었다. 쉴레는 발리에게 하름스와의 관계를 고백하고, “결혼 후에도 여름마다 함께 휴가를 보내자”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발리는 이를 거절하고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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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트와의 결혼으로 쉴레는 다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쉴레는 빈 교외 히츠잉(Hietzing)에 정원과 작업실이 딸린 집을 마련하고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결혼 이후 쉴레는 이전처럼 도발적인 누드화보다는 가족적이고 차분한 주제의 인물들을 그렸다. 이때의 작품 〈가족〉은 아내 에디트와 아직은 뱃속에 있는 그들의 아이를 그린 작품으로, 그의 평온한 삶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가족>을 그린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에디트는 스페인 독감으로 뱃속의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쉴레는 역시 독감을 얻어 신음하다 에디트가 사망한 지 3일째 되던 날 사망했다.


쉴레의 <가족>은 그와 그의 가족의 생애처럼 미처 완성되지 못한 채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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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쉴레와 아내 에디트가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작품들은 미완성 상태로 남거나 가족 지인들에게 나눠지고, 일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그의 여동생 게르트루트는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오빠의 작품을 한데 모으고자 노력하기도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특히 그의 누드 작품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평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헐 값에 여러 사람을 손을 거치다 버려지거나 불태워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뒤늦게나마 그의 작품들이 수집되어 보존되고 현재와 같이 전시될 수 있게 된 것은 루돌프 레오폴트 박사의 남다른 예술적 감각과 헌신적인 지원의 결과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2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레오폴트는 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안과 의사로 활동 중 1950년대 초 빈의 미술사 박물관을 방문하고 미술에 매료되어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3년 대학 졸업 선물로 폭스바겐 비틀을 사주겠다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대신 쉴레의 〈은둔자들〉을 선물로 받았다.


이후 그는 쉴레의 그림을 찾아 나서 닥치는 대로 구입했는데, 당시에도 쉴레의 작품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저평가되어 레오폴트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작품을 살 수 있었다.


그는 평생을 통해 쉴레의 회화 작품 220여 점과 드로잉 2,000여 점을 수집했다. 그는 쉴레 이외에도 클림트, 코코슈카 등 오스트리아 출신 모더니즘 작가의 작품 5,000여 점을 수집하여 1994년 오스트리아 정부, 국립은행과 협력해 레오폴트 재단을 설립하고 이를 재단의 컬렉션으로 기증했다.


레오폴트 재단은 2001년 빈의 뮤지엄쿼터(MQ)에 레오폴트 미술관을 개관하고 레오폴드 박사가 수집한 작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레오폴트 미술관은 쉴레 작품의 최대 전시관이 되었다.


현재 레오폴트 미술관 외에도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알베르티나, 프라하 국립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 MoMA, 런던 테이트 모던 등 주요 미술관도 쉴레의 일부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하고 있다.


이들은 쉴레 사후 가족이나 지인이 소장한 작품을 매입하거나, 개인 소장가들의 작품을 경매를 통해 구입했으며, 일부는 나치가 몰수한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구입하거나 편입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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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으로 공연 기획자였던 프리츠 그륀바움(Fritz Grünbaum)은 생전에 쉴레의 작품 81점을 소장하였다. 그는 1938년 나치에 체포된 뒤 그의 컬렉션을 몰수당하고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나치는 그의 쉴레 작품을 ‘퇴폐적’이라고 규정하고 창고에 보관하다 일부는 개인에게 그냥 나눠주고 일부는 국제 미술시장에 헐값에 매각했다.


2023년 뉴욕의 맨해튼 지방검찰청은 나치가 약탈하여 여러 경로로 처분하여 소유 중인 쉴레 작품 7점을 원 소유자(쉴레)의 후손에게 반환토록 판결했다.


이때 반환 판결을 받은 작품에는 MoMA가 소유 중인 〈매춘부>와 〈신발 신는 소녀〉등이 있다. 이들 작품은 프리츠 그륀바움의 후손에게 반환되었다.


에곤 쉴레는 ‘사회적으로 위험한 화가’가 아니라 ‘요절한 천재 화가’였다. 뒤늦게나마 후대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의 작품을 ‘외설’에서 ‘걸작’으로 구해 낸 것은 매우 다행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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