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제빵사 - 죽음과 고통을 표현주의로 그리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640px-Cha%C3%AFm_Soutine_-_Le_Petit_P%C3%A2tissier.jpg?type=w773 Le Petit Pâtissier - Chaïm Soutine



하임 수틴(Chaim Soutine)의 1922년 유화(huile sur toile) 작품이다. 73 × 54 cm 크기로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다.


수틴은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화가로, 격렬한 붓질로 죽음과 고통을 주제로 한 독창적인 표현주의 작품을 남겼다.


1893년 당시 러시아 제국(현재 벨라루스) 민스크 인근의 스미로비치에서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폭력과 차별을 경험했다. 그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의 대상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림에 각별한 취미를 갖고 있던 그는 차별을 피하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보겠다는 포부를 안고 1913년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는 당시 세계 미술의 중심지였고, 표현주의와 모더니즘 등 새로운 예술의 세계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었다.


그러나 수틴의 파리 생활은 그리 녹녹지 않았다. 파리는 그에게 극심한 가난과 이방인이라는 고립감을 선사했다. 와중에도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다. 그는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고 파리 15구 ‘벌집’(La Ruche)의 피카소, 샤갈, 모딜리아니 등과 같은 이민자 예술가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벌집은 파리 시정부가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거의 무상으로 제공한 벌집 같은 공동생활공간이었다.


그는 ‘파리 학파(École de Paris)’의 일원이 되었으나 중심에서 활동하지는 못하고 주변을 겉도는 정도였다.


에콜 드 파리는 당시 파리에 모여든 다국적의 예술가들이 모인 집단으로, 특정한 화풍이나 이론을 좇기보다는 단지 ‘파리’라는 도시에서 공존하며 창작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로를 의지하며 각자의 개성과 독창적인 화풍을 추구하는 열린 공동체였다.



Amedeo_Modigliani_-_Chaim_Soutine_(1917).jpg?type=w773 Chaim Soutine - Amedeo Modigliani



에콜 드 파리의 이방인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수틴을 이해하고 그를 챙긴 이는 모딜리아니였다. 수틴과 모딜리아니는 유대인 출신, 가난과 질병, 사회적 소외, 예술적 열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이에 수틴의 내성적이고 불안정한 성격, 모딜리아니의 사교적이고 보헤미안적 기질은 서로를 이해하고 보완하게 한 기반이 되었다.


모딜리아니는 수틴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고, 미술상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에게 수틴을 소개해 후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즈포로프스키에게 수틴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려주며 그의 존재를 예술계에 알려주기를 부탁했다.


수틴은 모딜리아니의 건강이 악화될 때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시간을 함께 했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깊은 상실감에 빠져 평생토록 그의 초상화를 간직했다 한다.


수틴은 모딜리아니의 영향으로 초상화 작업을 많이 했다. 그의 <어린 제빵사>(Le Petit Pâtissier)도 그중의 하나다.


수틴은 이 작품에서 제과점에서 일하는 어린 수습생을 그렸다. 어린 제과사는 화면 중앙에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아 쥐고 가만히 앉아 있다. 마치 증명사진을 찍기라도 하는 모습이다. 얼굴과 몸은 약간 뒤틀려 긴장감을 주고 있다. 당당한 척 잔뜩 폼을 재고 있긴 하나 왠지 모르게 짠한 느낌을 준다.


제빵사의 흰색 복장과 붉은 손수건의 대비가 강렬하다. 배경은 어두운 색조로 처리되어 인물의 존재감이 더욱 살아난다. 수틴 특유의 격렬하고 불안정한 붓질이 인물의 긴장과 불안을 여과 없이 드러내게 한다.


수틴은 요리사, 급사, 성가대 소년 등 일상에서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같은 인물을 많이 그렸다. 이는 화려한 중심의 인물 대신, 평범하고 가난한 주변의 사람들의 내면을 읽어내고자 한 시도였다.



ChaimSoutine_1925_-_Le_groom.png?type=w773 Le Groom - Chaim Soutine


현재 파리 퐁피두 센터의 국립현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에 있는 그의 또 다른 작품 <벨보이>(Le Groom)의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강렬한 붉은색의 제복은 어둡고 추상적인 배경에서 존재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두텁고 격렬한 붓질이 제복의 질감을 강조하며, 벨보이의 심리적 긴장과 불안정성을 대신해 보인다.


인물은 화면 중앙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자세로 정면 응시하며, 보는 이에게 벨보이로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적극적으로 묻고 있는 듯한 표정이기도 하다.


얼굴은 길게 늘어져 있고, 입술은 오므려져 있으며, 신체 비례가 불안정해 보인다. 수틴 특유의 표현주의적 왜곡으로, 인물의 내면이 그리 평온치 않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벨보이의 제복은 매우 당당하고 위압적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표정과 자세는 불안과 긴장의 모습이 역력하다. 당당한 제복도 이를 완전히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La_cocinera_(Mujer_de_azul)_-_Cha%C3%AFm_Soutine.png?type=w773 La cocinera - Chaïm Soutine



<여자 요리사>(La Cuisinière)도 수틴의 직업인 초상화 중 하나다.


인물은 요리사 복장을 하고 있으며, 얼굴과 손, 옷의 형태가 뒤틀려 있지만, 그 안에서 존엄성과 감정적 깊이가 드러난다.


배경은 극히 단순하여, 인물의 존재감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View_of_Cagnes_MET_DT4178.jpg?type=w773 View of Cagnes - Sutine


수틴은 모딜리아니가 없는 파리 생활에서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모딜리아니가 생전에 소개해 준 그의 후원자 즈보로프스키는 이 같은 수틴의 상태를 눈치채고 수틴이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의 세레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생활비와 작업 공간을 제공했다.


세레는 피레네산맥 근처의 작은 마을로, 지중해성의 온화한 기후와 독특한 자연 풍광으로 예술가들에게는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수틴은 이곳에서 모딜리아의 죽음이 가져온 절망과 슬픔을 풍경 속에 담아내며 자신의 표현주의적 화풍을 확립했다.


세레의 강렬한 태양 아래 아름답게 펼쳐진 언덕과 마을들, 그리고 마을을 장식하는 예쁜 지붕의 작은 집들은 수틴의 붓을 통해 강렬한 색채와 독특한 형태로 뒤틀린 채 표현되었다. 수틴 자신의 불안과 긴장은 초상화 속의 수습생이나 벨보이의 그것 마냥 세레의 풍경을 왜곡하고 긴장시켰다.


문득 수틴은 자신의 이런 작품이 그를 더 불안과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고 혐오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많은 작품을 난도질하여 찢고 버렸다.


그는 세레의 평온함이 파리에서의 상실감을 상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혐오감과 파괴적 충동을 키우고 있다고 자각했다. 결국 그는 세레를 떠나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640px-Man_with_Horse_MET_67.187.104_-_color.jpg?type=w773 Man with Horse - Soutine


파리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영감을 좇아 루브르를 찾았다. 그는 루브르 전시실 한구석에 걸려있는 렘브란트의 <도살된 황소>(Slaughtered Ox)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 그림에서 어린 시절 벨라루스 고향에서 거위가 도살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겪었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 모딜리아니의 죽음의 순간이 떠올랐다. 유대인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폭력과 차별의 기억이 살아났다.


그는 작업실에 소, 닭, 꿩 같은 동물 사체를 걸어두고 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사체는 역한 악취를 발하고, 주변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틴은 혼신의 힘을 다해 사체의 정물화를 그렸다. 사체가 썩어 색이 바래면 정육점에서 피를 사 와 다시 부어 생생한 붉은색을 띠게 하여 다시 그렸다.


이렇게 그려진 그의 사체 정물화는 죽음과 고통, 인간 존재의 불안정성을 표현하는 강렬한 상징으로 발전했다.



640px-Soutine-2014-06.jpg?type=w773 Le Poulet Plume - Soutine



모딜리아니는 죽은 후에도 수틴을 지극히 챙겼던 것 같다. 생전에 모딜리아니는 수틴의 초상화를 여럿 그리고 이를 자신의 후원자이자 파리 미술계의 큰 손이었던 폴 기욤에게 팔았다. 기욤은 모딜리아니의 이 초상화들 중 일부를 당시 미국 미술계의 큰 손인 알버트 C. 반스와 거래했다.


모딜리아니 사후 반스가 미술품 수집 차 파리에 온 계기에 모딜리아니의 초상 속에 있는 수틴의 존재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이에 기욤은 당시 무명의 화가 수틴을 반스에게 소개했다. 반스는 수틴의 <어린 제빵사>를 본 순간 “이건 걸작이다!”라고 외치고, 곧바로 수틴의 작품 50여 점을 구매했다.


수틴의 작품은 반스의 손을 거쳐 미국 미술계에서 큰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수틴은 그간의 가난과 무명의 치욕을 씻어 던지며 세계적인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Soutine-2014-12.jpg?type=w773 Soutine


1939년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수틴의 삶을 다시 한번 흔들어 놓고 말았다. 나치 독일은 1940년 5월 프랑스를 침공하여 6월에는 파리를 점령했다.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수틴은 자신이 유대인임을 감출 수 없는 상황에서 나치의 유대인 색출이 강화되자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 시골 지역으로 은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늘 체포될 위험에 시달리며 은신처를 자주 옮기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1943년 은신 중 급성 위궤양으로 출혈이 악화되어 하는 수없이 파리로 돌아와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그는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는 파블로 피카소, 장 콕토 등 당대 예술계 저명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여 수틴의 예술적 성취와 위상을 추모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반스 재단(Barnes Foundation)은 아직도 수틴의 작품을 대량 소장하고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뉴욕의 유대인 박물관(Jewish Museum)은 수틴의 도축 정물화와 인물 초상화를 통해 그의 폭력, 고통, 죽음의 주제가 주는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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