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피카소는 20세기 미술사에 혁명적 사건을 만든 인물이자 개인적으로는 복잡한 삶을 살아간 풍운아다.
그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파블로이고 성은 아버지의 성 루이스와 어머니 성 피카소를 합쳐 쓴 것이나, 실제로 본명은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 로스 레메디오스 치프리아노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스 이 피카소’로 매우 길고 복잡하다.
피카소의 본명이 길고 복잡한 이유는 당시 스페인의 가톨릭 전통에 따라 세례명으로 가문의 성인의 이름과 가톨릭 성인들의 이름을 길게 붙이고, 가문의 전통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조부모, 부모, 친척들의 이름까지도 반영하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성(루이스)과 어머니의 성(피카소)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이다. 통상 예술사에서는 이름과 성의 순서로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라고만 부르고 있다.
피카소는 어린 시절 화가이자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와 마드리드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이후 1900년 파리로 건너가 예술 활동을 시작하고 대부분의 생애를 프랑스에서 보냈다.
그는 1918년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와 결혼하고 1941년 별거했다. 두 사람은 가톨릭 신앙을 이유로 별거 이후에도 이혼을 하지 않았지만 1955년 올가가 칸에서 사망하면서 법적 혼인 관계가 종료되었다.
피카소는 1961년에는 재클린 로크와 재혼했다. 재클린은 프랑스 무장 출신으로 1952년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던 중 피카소를 만났다. 피카소는 그녀를 모델로 삼아 400점 이상의 초상화를 남겼으며, 죽는 날까지 법적 배우자로 함께 살았다.
피카소는 공식적인 결혼과는 무관하게 수많은 여성들과 연인 관계를 이어갔다. 이들 연인들과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두기도 했다. 연인들 또한 그의 수많은 작품에 등장한다. 작품 속의 연인들은 종종 왜곡된 형태로 표현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술사가들은 피카소의 예술 생애를 시대순으로 4가지로 구분한다.
파리로 이주한 초기 1901년에서 1904년까지를 청색시대라 한다. 이때의 작품들은 블루 톤의 우울하고 차가운 색조를 띠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기타 치는 노인>(The Old Guitarist)가 있다.
이후 1904년에서 1906년까지를 장미시대라고 부른다. 이때 그는 작품은 차츰 붉은색을 기반으로 따뜻하면서도 화려한 색채로 표현되었다. 대표작으로는 <곡예사 가족>(Family of Saltimbanques)를 꼽는다.
1907년 이후 그는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이에 따라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분해하고 재조합하는 형식의 입체파(Cubism)를 주도하게 된다.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로 대변된다.
1937년 피카소는 반전 작품 <게르니카>(Guernica)를 발표하며 작품에 정치적 메시를 담아냈다.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반전 평화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피카소의 창작 열정은 회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조각, 판화, 도자기, 무대 디자인, 글쓰기까지 폭넓게 활동하며 50,000 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이들 작품 중 양적으로는 판화 작품이 18,000여 점으로 가장 많고, 회화는 사실상 1,900여 점으로 전체 작품의 4% 정도에 불과하다.
피카소가 다작의 예술가였던 만큼 현재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피카소 미술관’이 세계 각지에 산재하고 있다.
이중 피카소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미술관은 프랑스 파리의 ‘국립 피카소 미술관’(Musée national Picasso-Paris)이다.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은 회화, 조각, 드로잉, 판화, 도자기, 노트북 등 피카소 전 생애를 아우르는 세계 최대 컬렉션으로 약 5,000점 이상의 피카소 작품과 수만 점의 피카소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두 번째 큰 피카소 미술관으로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Museu Picasso’를 꼽는다. 이곳은 약 4,000점 이상의 피카소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는 피카소의 초기 청색시대 작품이 많고 그가 직접 기증한 <시녀들>(Las Meninas) 변주 시리즈(총 58점)가 유명하다. <시녀들>은 원래 바로크 미술의 대가로 알려진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이다.
피카소의 고향이기도 한 스페인 말라가의 ‘피카소 미술관’(Museo Picasso Málaga)은 그의 손자 Bernard Ruiz-Picasso 등 후손들이 기증한 200여 점의 작품과 유품을 소장하고 있다.
역시 말라가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Museo Casa Natal)은 피카소가 출생한 집을 작은 박물관으로 만들어, 그의 초기 드로잉 작품들과 가족들 관련 아카이브로 운영되고 있다.
그가 1946년 잠시 머물렀던 프랑스 남부 안티브의 그리말디 성Château Grimaldi)도 현재 ‘피카소 미술관’(Museo Picasso, Antibes)으로 운영되며 그가 그곳에서 그린 작품들과 그의 전후(2차대전)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대표작으로는 <삶의 기쁨>(La Joie de Vivre)이 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 대표작 <기타 치는 노인>은 현재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그가 바르셀로나에서의 청색시대에 제작한 작품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늙은 기타리스트가 푸른색 톤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작품 속 인물은 피카소가 당시 경험한 빈곤과 절망을 반영하며, 인간 존재의 고독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후대 미술관 관계자들이 이 그림의 적절한 보존을 위해 엑스레이 조사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림의 밑그림이 몇 번에 걸쳐 바뀐 것을 발견했다.
가장 뚜렷하게 확인된 것은 젊은 여성이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있고, 이 데생 위에는 다시 다른 여성과 동물(혹은 남성 인물)로 추정되는 형상이 덧씌워져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피카소는 처음에 이 캔버스에 여러 인물을 그리려 시도했다가 결국은 늙은 기타리스트를 그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어쩌면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 캔버스를 재사용한 흔적인지도 모른다.
피카소의 장미시대를 대표하는 <곡예사 가족>은 서커스 단원들의 고독과 예술가의 정체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대형 유화 작품이다. 미국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에 전시되어 있다.
그림에는 광대, 젊은 곡예사, 소년, 소녀, 모자를 쓴 여성 등 여섯 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함께 서 있지만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각자 고립된 듯한 자세로 황량한 배경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피카소는 다른 작품에서도 광대를 자주 등장시키고 자신의 자화상 인물로도 활용하였는데, 이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외로움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된다.
피카소가 1907년에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린 혁명적 작품으로, 입체주의(Cubism)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피카소 자신의 원래 제목은 <아비뇽의 홍등가>(Le bordel d’Avignon)이었는데 당시 검열에 걸려 고민하던 중 시인 앙드레 살몽이 <아비뇽의 처녀들>로 작명을 다시 해 주었다.
화면은 다섯 명의 여성이 크게 등장한다. 여성들은 바르셀로나 아비뇽 거리의 매춘부 다섯 명을 모델로 했다. 여성들의 얼굴은 가면처럼 처리되었다. 아프리카 가면과 이베리아 조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당시 인물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얼굴에 관심이 많았던 관람자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피카소가 바라본 아비뇽의 처녀들은 20세기 초 급격한 도시화와 기술 문명의 발전 속에서 성적 욕망과 공포, 불안이라는 문화적 충돌을 겪고 있는 현대인의 대표적 군상인 것으로 해석된다.
인체는 볼륨감이 전혀 없이 평면적이고 각진 형태로 분해되어 있다, 여러 시점을 동시에 담아낸 파격적 구성이다. 배경도 전통적인 원근법을 구사한 흔적이 전혀 없다. 입체주의의 탄생을 선언한 것이다.
이 그림은 당시 미술계에 회화 작품의 신세계를 본 것과 같은 크나큰 충격을 주었으며, 피카소의 동료 브라크는 “나는 이러한 작품에 목숨을 걸겠다”라고 선언하고 입체파 화법을 크게 발전시켰다.
피카소가 1937년 스페인 내전 중 바스크 지역의 게르니카 폭격을 주제로 한 <게르니카>(Guernica)는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반전 회화로 평가받고 있다. 작품은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1937년 4월 26일 독일 나치의 공군이 스페인 내전에서 반정부 지도자 프랑코를 지원하며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정치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적 이념을 상징하는 도시였다. 당시 바스크의 정치 지도자들은 ‘게르니카의 참나무’ 아래에서 공화정의 자치권을 선언했다. 또한 당시 공화파의 정부군은 게르니카를 요충지로 확보하고 이탈리아와 독일의 지원을 받고 있던 반정부군을 압박했다.
나치 독일은 프랑코 군의 요청으로 게르니카를 공습했다. 나치의 공습은 당시 새로 창설한 루프트바페(공군)의 폭격 전술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폭격은 게르니카 광장에 장이 서는 날에 맞춰 진행했다. 따라서 평소보다 더 많은 시민이 도심에서 활동 중이었고, 그 결과 수백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며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피카소는 이 같은 참상을 듣고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전시할 대작으로 <Guernica>를 그렸다.
작품의 화면은 흑색, 회색 등의 단색조로 칠해져 차갑고 공포스럽다. 입체주의 기법으로 분해되고 조합된 인물들과 동물들은 혼란과 비극을 표현하고 있다. 황소의 머리는 나치 독일의 잔혹성을 상징하고, 황망히 날뛰는 말은 게르니카의 민중들을 대변한다. 울부짖는 여성과 아이들 사이에서 부서진 검과 꽃이 보인다. 와중에도 반전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게르니카>는 이후 반전 운동과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사용되었으며, 20세기 미술 중 가장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피카소는 한국전쟁을 계기로도 반전 작품을 남겼다. 그는 1951년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라는 작품을 통해 전쟁의 잔혹함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그림 속 왼쪽으로는 나체의 여성들과 아이들이 무방비 상태로 서 있다. 이들은 임신한 여인, 아이를 안은 어머니, 겁에 질린 소녀 등 다양한 부류의 민간인임이 분명하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마치 중세의 기사처럼 묘사된 무장 병사들이 총과 창을 겨누고 있다. 피카소는 이 병사들을 성기가 없는 것으로 그렸다, 이들은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는 비인간적인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피카소는 이 작품에 직접 <Massacre in Korea>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그는 특정 사건이나 특정 전투를 지목하지는 않았다. 후에 “나는 특정 국가의 군복이나 군모를 그린 것이 아니라, 전쟁의 잔혹성 자체를 고발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제목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특정하기보다는 일반적인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피카소는 프랑코 독재에 반대하고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으로서 좌파 성향의 인물이었다.
피카소의 1946년 작품 <삶의 기쁨>(La Joie de Vivre)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가 새로운 사랑을 찾고 자유를 만끽하며 희망적인 분위기를 그린 것이다. 마티스가 그린 <Bonheur de Vivre>를 패러디한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프랑스 앙티브의 피카소 미술관(Musée Picasso, Antibes)에 있다.
화면에는 피리 부는 파우누스, 춤추는 생명체, 켄타우로스 같은 신화적 존재들이 등장하며, 지중해의 태양 아래 자유와 풍요를 즐기는 모습들이 등장한다.
인물들의 유려한 곡선과 소용돌이치는 선은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와는 달리 마치 꽃이 자라나듯 화사하고 생명력 넘치는 분위기를 전달한다.
피카소는 2차 대전 중에도 파리에 머물렀으며, 파리가 독일군의 점령하에 들어간 이후에도 파리를 떠나지 않고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공산당원이기도 했고, 그의 작품은 나치가 선호하는 고전주의적 미술과는 전혀 달라 늘 게슈타포의 감시하에 있었다.
당시 게슈타포가 그의 아틀리에를 압수 수색하던 중 <Guernica> 작품의 사진을 보고 “이걸 당신이 그린 거냐?”라고 묻자, 피카소는 "아니요, 당신들이 한 짓이오”라고 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지중해 연안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니스 인근의 앙티브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그는 프랑수아즈 질로와 새로운 사랑을 나누며, 그녀와의 달콤한 생활을 많은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피카소가 그녀를 모델로 삼아 그린 대표작으로는 <여인 - 꽃>(La femme-fleur) 연작이 있다.
두 사람은 1943년 파리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피카소는 61세로 많은 나이였으나, 질로는 21세의 젊은 처녀였다.
질로는 화가이기도 했다. 그녀는 피카소로부터 입체주의적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피카소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럽고 유연한 형태를 그렸다.
피카소와 질로의 관계는 10여 년간 이어지며 아들과 딸 하나씩을 두었다. 후에 성장한 아들 클로드 피카소는 영화 제작자로 활동하고, 피카소 사후에는 그의 저작권과 유산을 상속받았다. 딸 팔로마 피카소는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어 Tiffany & Co.의 대표 주얼리를 디자인했다.
1953년 질로는 피카소를 떠나고 말았다. 피카소의 폭력적인 성향과 지속되는 염문을 더는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스로 피카소를 떠난 유일한 여성’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녀는 1964년 피카소와 함께한 시절을 회고한 <Life with Picasso>을 출간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질로는 피카소와의 결별 이후에도 화가로서 꾸준히 활동하며 수채화, 도자기, 판화 등 다양한 작품을 제작했다. 1955년 화가 Luc Simon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1970년에는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인 조너스 소크(Jonas Salk)와 결혼해 미국에서 살았다.
2023년 10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질로라는 이름의 한 화가로서 나름 성실히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피카소는 자신을 버린 유일한 여성 질로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그는 질로의 회고록 출간을 막으려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고, 이후에도 그녀의 대외 활동을 방해하고 폄훼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도라 마르, 마리-테레즈 발터 등 여러 여성들과의 관계를 계속하고, 이후 재클린 로크를 만나 1961년에 결혼했다. 그녀는 1973년 피카소가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피카소의 마지막 여인으로 그와 함께 했다.
피카소는 로크와의 말년에도 회화는 물론이고 도자기, 판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정치적으로도 반전, 평화 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입체주의적 분절을 유지하면서도 색채와 형태를 더욱 자유롭게 구사하여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건은 피카소의 작품들이 스페인, 프랑스, 소련, 인도, 유엔 등 세계 여러 나라와 국제기구의 우표에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가 20세기 미술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여러 국가와 국제기구가 그의 문화적 위상을 기념하고 국제적 교류를 상징하기 위해 그의 작품을 우표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게르니카> 같은 작품은 반전 메시지를 담고 있어 정치적 의미가 강조되며 다수의 우표에 실렸으며, 피카소 우표는 예술적 가치뿐 아니라 희소성 때문에 필라텔리(우표 수집) 시장에서도 높은 관심을 받았다.
1978년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발행된 피카소 관련 우표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피카소는 20세기 인류사에서 예술과 사랑, 정치와 외교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든 혁명가이자 풍운아였음이 분명하다.
※ 피카소 작품의 원본 이미지는 현재 저작권 문제로 공개가 매우 제한적임을 양지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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