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기욤 – 현대미술의 항해사가 되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Amedeo_Modigliani_-_Paul_Guillaume,_Novo_Pilota.jpg?type=w773 Paul Guillaume, Novo Pilota - Amedeo Modigliani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1915년에 판지에 유화로 그렸다. 105 × 75cm 크기로 현재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에 소장되어 있다.


모딜리아니는 인체를 그림에 있어 얼굴과 몸을 길게 늘어뜨린 형태로 그린 화가이며 조각가이기도 하다. 생전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사후에 20세기 인물화와 누드의 새로운 기준을 세운 예술가로 재평가되었다.


그는 1884년 이탈리아 리보르노(Livorno)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폐결핵 등 잦은 병치레로 학교를 자주 쉬었으며, 이때마다 어머니가 직접 고전과 미술을 가르쳤다.


14세 때 리보르노의 미술학교(Scuola di Belle Arti)에 입학해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하고, 피렌체의 미술 아카데미(Accademia di Belle Arti)로 진학하여 르네상스 회화와 드로잉을 배웠다.


1903년에는 베네치아 미술학교(Accademia di Belle Arti di Venezia)에서 미술 공부를 계속하며 상징주의와 현대적 경향의 회화를 접하게 되었다.


1906년에는 파리로 이주해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의 피카소, 막스 자콥, 앙드레 살몽 등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작품 활동을 본격화했다.


Amedeo_Modigliani_-_Christina.jpg?type=w773 Christina - Amedeo Modigliani



1909년 이후에는 조각에 몰두했는데, 아프리카 조각과 브랑쿠시의 영향으로 형체를 단순화하여 길게 늘이는 방식으로 독특한 비례감을 표현했다. 이 같은 방식은 그의 회화에도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는 루마니아 출신의 조각가로 단순화된 형태와 본질을 추구하는 미적 감각으로 ‘현대 조각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는 초기에는 로댕의 조수로 일했으나 곧 독립하고, ‘진정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는 로댕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석고나 점토로 선(先) 작업을 하지 않고 대리석, 목재, 청동의 재료를 직접 조각(Direct Carving) 했다. 조각에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하고, 형태의 본질을 드러내는 순수한 선과 곡선만 남겼다.


그러나 모딜리아니의 조각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건강 문제로 조각을 하기에는 체력의 한계를 느꼈으며, 경제적으로도 조각을 계속할 수 있는 공간과 재료를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파리 인상주의 미술의 최대 수집가이자 최고의 후원자로서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된 폴 기욤 컬렉션으로 유명한 폴 기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모딜리아니의 작품도 존재할 수 없었다.


파리에서의 모딜리아니의 생활은 매우 곤궁하고 불안정했다. 그의 폐결핵 증상은 지병으로 발전하였고, 이에 술과 약물에 의존하며 가난한 화가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모딜리아니는 1914년 시인 막스 자콥(Max Jacob)의 소개로 젊은 화상 폴 기욤(Paul Guillaume)을 만나게 되었다.


기욤은 당시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던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간파하고 몽마르트르에 작업실을 마련해 주는 한편, 그의 작품을 구매하고 전시회를 마련하는 등 최대의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파리 아브뉘 드 빌리에(Avenue de Villiers)에 있던 기욤의 아파트 겸 갤러리에는 모딜리아니의 작품이 다수 걸렸다. 기욤은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프랑스뿐 아니라 미국의 최대 화상이었던 알버트 반스(Barnes Foundation 설립자)에게도 공급했다.


기욤이 사망하고 후에 아내 도메니카(Domenica Guillaume)가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한 그의 컬렉션(장 발테르–폴 기욤 컬렉션)에는 모딜리아니의 작품이 다수 포함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1977년 장 발테르-폴 기욤 컬렉션을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이관했다.



Modigliani,_Amedeo-Redheaded_woman_wearing_a_pendant-1918.jpg?type=w773 Redheaded woman wearing a pendant (1918) - Modigliani, Amedeo


모딜리아니는 기욤의 초상화를 여러 버전으로 그려 남겼다. 그중에서도 그의 회화적 특색을 여실히 드러나면서도 기욤에 대한 최대의 헌사를 표현한 작품은 <폴 기욤 – 새로운 항해사>(Paul Guillaume, Novo Pilota)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면 전체의 붉은 배경 위에 검은 양복과 모자를 쓴 기욤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기욤은 모딜리아니 특유의 길게 늘어난 얼굴로 단순화된 선과 아몬드 형 눈을 가졌다. 왼손은 거의 스케치 수준으로 단순화되어 보는 이는 그의 얼굴과 시선에 집중하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화면에 ‘Novo Pilota’(새로운 항해사)라는 문구가 직접 적어 넣었다. 이에 더하여 다윗의 별을 그리고, ‘Stella Maris’(바다의 별)라고도 썼다. 자신의 서명과 당시 길조로 쓰이던 불교의 만(卍) 자 모양까지 그려 넣었다.


그는 피후원자의 입장에서 기욤을 현대 예술을 이끄는 항해사로 상징한 것이다. 후원자에게 바치는 최고의 헌정 작품이다.


기욤은 1934년 사망할 때까지 꾸준히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알리고 판매를 주선했다.



640px-Amedeo_Modigliani_Jeanne_Hebuterne_assise_de_profil.jpg?type=w773 Jeanne Hebuterne assise de profil - Amedeo Modigliani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에서 활동하며 많은 여성들과 자유분방한 사랑을 나누며 보헤미안처럼 생활했다. 그의 사랑은 19살의 미술학도였던 잔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과 절정을 이루었으나 마무리는 매우 비극적이었다.


어린 잔은 모딜리아니의 격정적인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모델이자 연인이 되어 바로 동거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딸을 낳고 잔과 같은 잔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두 사람은 삶과 예술을 함께하는 동반자로서 아름다운 사랑을 가꾸어 가는 듯했다. 하지만 가난과 병마는 그들의 사랑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모딜리아니는 어린 시절부터 알아온 폐결핵과 장티푸스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알코올에 취해 살았으며 아편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종종 폭력적인 성향을 더하기도 했다.


모딜리아니는 잔과 함께 한 지 4년 만에 폐결핵성 뇌막염으로 3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죽은 지 이틀 후, 22살의 잔은 임신한 상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모딜리아니와 함께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두 사람은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고아가 된 딸 잔은 친척들에게서 자랐지만 후에 미술사를 공부하고 학자가 되어 아버지의 삶과 작품을 연구하며, 모딜리아니의 전기를 집필하여 그의 명성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4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딜리아니는 연인 잔 에뷔테른을 주제로 수십 장의 초상화를 남겼으며, 그중에서도 〈잔 에뷔테른의 초상〉(Portrait of Jeanne Hébuterne)이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잔은 의자에 앉아 다소곳하게 손을 모은 모습이다. 배가 살짝 나온 것으로 묘사되어, 당시 그녀가 첫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단순화된 배경과 인물의 길게 뻗은 목, 타원형 얼굴, 아몬드 형 눈, 텅 빈 눈동자 등 모딜리아니의 특유의 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Amedeo-Modigliani-berthe-weill-first-oneman-exhibition-nudes-1917-paris.jpg?type=w773 Amedeo Modigliani - first oneman exhibition nudes, 1917 paris



모딜리아니는 관능적인 누드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1917년 파리에서 열린 생애 첫 개인전에서 누드화를 전시했는데, 작품들의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이유로 경찰의 검열을 받고 전시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전시는 모딜리아니 생애 유일한 개인전이었고,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는 씁쓸한 기록을 남겼다.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도 그의 인물화와 다름없이 길게 늘어진 얼굴, 아몬드 형 눈 등 그의 독특한 조형적 양식으로 그려졌다. 대상 여성의 피부는 붉은색, 살색, 갈색 계통의 따뜻한 색으로 칠해져 살아있는 듯한 현실감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모델은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수줍음이 아닌 당당함을 드러내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누드화에 집중하기에는 폴란드 출신 화상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Leopold Zborowski)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즈보로프스키는 당시 국제적 명성을 갖은 폴 기욤 정도는 아니었지만 파리의 화가들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화상이자 후원자였다.


즈보로프스키는 모딜리아니의 누드화가 대중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의 작업을 독려했다. 그는 건강과 알코올, 경제적 문제로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던 모딜리아니에게 생활비와 모델을 지원하고 술과 담배를 제공하며 누드화 제작에 집중토록 강요하다시피 했다. 모딜리아니의 누드화 개인전을 주선한 이도 바로 즈보로프스키였다. 즈보로프스키의 이 같은 방식은 당시에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오늘날 더욱 심화되고 있는 자본주의 예술시장의 명암이라 할 수 있다.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는 당시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대중으로부터 거부당했지만, 오늘날에는 인간 존재의 숭고함과 생명력을 표현한 작품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2015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누드 작품은 1억 7천만 달러에 낙찰되기도 했다.


640px-Amedeo-Modigliani-Nudo-rosso.jpg?type=w773 Nudo rosso - Amedeo Modigliani


모딜리아니의 짧은 생애는 현대 예술의 거친 파도를 헤쳐가는 고난의 항해였다. 그의 성취는 고스란히 현대인의 축복으로 빛나고 있다.


몽파르나스에 있는 그의 묘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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