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붉은 바지를 입은 오달리스크>는 앙리 마티스가 1924년 프랑스 니스에서 그린 유화 작품으로, 크기는 50 × 61cm이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에 있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1852년 나폴레옹 3세가 튈르리 정원에 겨울 동안 오렌지 나무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온실에서 출발했으며, 1920년대 이후 미술관으로 전환되어 오늘날 인상주의와 현대미술의 명작들을 소장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1927년 클로드 모네가 기증한 대작 <수련>(Nymphéas)을 위한 전용 전시실을 개축했다. 이 전시실은 모네가 직접 설계에 참여해 두 개의 타원형 전시실로 만들었으며, 자연광을 활용해 작품 감상에 최적화된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1959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장 왈터–폴 기욤 컬렉션을 인수하여, 인상주의와 현대미술의 걸작들을 대거 소장하게 되었다.
2006년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현대적 전시관으로 재개관했다.
장 왈터–폴 기욤 컬렉션은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의 핵심 상설 컬렉션으로, 인상주의부터 20세기 초 현대미술까지 아우르는 148점 이상의 회화 작품을 모은 세계적 수준의 컬렉션이다.
폴 기욤(Paul Guillaume)은 프랑스의 젊은 미술상으로, 1914년부터 1934년 사망할 때까지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현대미술 작품들과 아프리카, 뉴질랜드 등의 미술품까지를 폭넓게 수집했다.
그는 피카소, 모딜리아니, 수틴 등과 교류하며 당대 미술계의 통 큰 후원자 역할을 하며 개인 미술관 설립을 계획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현하지 못했다.
기욤의 미망인 도메니카 기욤은 이후 건축가인 장 왈터(Jean Walter)와 재혼하고 폴 기욤이 수집한 작품들을 정리하여 1959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 컬렉션을 인수할 때 도메니카의 두 남편의 이름을 따서 ‘장 왈터–폴 기욤 컬렉션’이라 명명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20세기 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로, 야수파(Fauvism)의 핵심 인물로서 색채와 형태의 자유로운 구사를 추구했다.
그는 1869년 12월 31일 프랑스 북부 르 카토-캉브레시에서 곡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로 유학하여 법학을 공부하고 법률 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중 맹장염으로 요양하게 되었는데, 이때 어머니가 물감을 선물해 주었고 이를 계기로 그림을 시작했다.
1891년 파리 아카데미 줄리앙(Académie Julian)에 입학하고 여기서 윌리엄-아돌프 부그로와 구스타브 모로에게 정물화와 풍경화를 배웠다.
1890년대 후반, 마티스는 반 고흐의 작품에 심취하며 인상주의 화풍을 추종했다.
이후 1905년 살롱 도톤(Salon d’Automne)에 강렬한 색채로 그린 <모자를 쓴 여인>(Woman with a Hat)을 발표하며 야수파(Fauves)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는 전통적 원근법과 명암을 거부하고,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색채와 형태를 강조했다. 그는 예술의 본질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 보는 이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며, 이러한 기쁨은 자유로운 색채에서 유래한다고 설파했다.
그의 이 같은 예술 철학은 <삶의 기쁨>(The Joy of Life) 같은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1917년 그는 프랑스 남부 해안 도시 니스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보다 화사한 색채와 장식적 패턴의 예술세계를 발전시켰다. 니스는 지중해 연안의 대표적 휴양지로 바이 데 장(Baie des Anges)이라 불리는 해변, 야자수와 돛단배로 어우러지는 풍경은 예술가들에게 환상적인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마티스도 당초 기관지 치료를 위해 이곳에 잠시 들렸다가 환상적인 햇살과 반짝이는 바다 색깔에 깊은 감명을 받고 정착을 결심했다.
그는 니스에서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 배경을 중심으로 오달리스크 연작을 제작했다.
오달리스크(Odalisque)는 원래 오스만 제국 궁정에서 왕비나 후궁을 시중드는 하녀를 말한다. 18세기 ∼ 19세기 유럽 화단에서는 오달리스크를 비스듬히 누워있는 자세의 여성 누드화 장르를 말하는데, 이는 실제로 오달리스크를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적 발상의 하나로, 일종의 이국적이고 관능적인 상상 속의 여인을 오달리스크라는 이름을 붙여 그린 것이다.
1930년대 이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회화 대신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방식(collage)에 집중했다.
1954년 11월 3일 니스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붉은 바지를 입은 오달리스크>(Odalisque à la culotte rouge)도 마티스가 니스에서 그린 오달리스크 연작 중 하나다. 폴 기욤(Paul Guillaume) 컬렉션 중 하나였는데 1963년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이관되었다.
화면의 구성은 오른쪽에 꽃무늬 패널이 공간을 닫아 평면성을 강조하고, 왼쪽은 가구가 있는 공간적 느낌이 살짝 보이는 구도로 짜여 있다.
여성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으며, 곡선과 대각선이 배경의 수직적 요소와 대비를 이루어 리듬감을 준다. 그녀는 금실로 수놓은 붉은 무어풍 바지와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하여 ‘동양적인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여성의 얼굴은 최소한의 붓 칠로 밋밋하고 평면적이다. 마티스는 이 작품의 제목으로 붉은 바지를 입은 오달리스크라고 붙이긴 했으나 정작 오달리스크라는 여성의 얼굴이나 몸매보다는 붉은색의 바지와 이와 대비되는 화면 전반의 색채, 그리고 장식적 패턴에 집중하여 그렸다. 색채와 장식이 주인공인 셈이다. 야수파의 전형적인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마티스의 <붉은 바지를 입은 오달리스크>라는 같은 제목의 또 다른 작품은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미술관에서 도난당했다 FBI의 수사로 10년 만에 되찾은 것으로 유명하다.
1925년 마티스가 그린 이 작품은 1981년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국립현대미술관을 설립한 소피아 임베르의 컬렉션으로 대표적인 전시작이었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석유산업의 호황으로 국제적인 미술품을 적극적으로 수집했고, 피카소, 미로, 샤갈, 마티스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확보해 남미 최고의 현대미술관을 운영했다.
이 작품은 전시 중 1999년 이후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가짜 그림으로 바꿔치기가 되었는데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2002년 같은 작품이 마이애미 경매 시장에 나오면서 이것이 진품으로 이미 도난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미국의 FBI 요원들이 경매시장에 잠입하여 10년간에 걸친 수사 끝에 결국 2012년 범인을 검거하고 진품을 회수하여 카라카스로 반환하였다.
마티스를 야수파의 중심에 서게 한 <모자를 쓴 여인>(Woman with a Hat)은 그의 아내 아멜리를 모델로 한 초상화다. 이 작품 또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마티스는 1897년 파리에서 아멜리를 만나 1898년 결혼했다. 그녀는 지적이고 세련된 여성으로 마티스가 예술에 몰두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티스의 여러 작품에서 아멜리는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 마티스가 러시아 출신 모델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두 사람은 결국 파국을 맞게 되었다. 1939년 아멜리는 ‘그녀를 대신해’ 마티스를 떠났다.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는 마티스의 니스에서의 예술을 완성시킨 숨은 실력자였다.
그녀는 1910년 러시아 시베리아의 톰스크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여러 곳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프랑스 니스로 이주하여 마티스 집안일을 도운 도우미로 일했다. 와중에 마티스의 눈에 들어 점차 그의 작업실에서 모델로 일하게 되었다.
마티스는 그녀를 모델로〈Woman in a Purple Coat〉등 90점 이상의 작품에서 그녀를 모델로 등장시켰다. 그는 그녀를 통해 새로운 색채와 형태를 실험하며, 오히려 젊은 시절보다 강렬한 창작의 열정을 불태웠다. 마티스는 그녀를 ‘눈의 빛(light of my eyes)’이라 부르며 자신의 예술을 만드는 영감의 원천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녀는 단순히 마티스의 모델에 그치지 않고, 스튜디오 운영을 총괄하며 마티스의 매니저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마티스의 전시회를 주관한 화상이나 평론가들은 그녀가 ‘군대도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조직력이 뛰어났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건강이 악화된 마티스가 가위로 그리는 그림(collage)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실질적으로는 그녀의 기획과 홍보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4년 마티스의 마지막 날에도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는 그의 곁을 지켰다.
마티스는 유럽의 화가이면서도 생전에 미국에도 널리 알려지고 미국 화단으로부터도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이는 아들 피에르 마티스(Pierre Matisse, 1900–1989)의 역할 덕분이었다.
피에르는 1924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1931년 뉴욕 맨해튼 57번가에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Pierre Matisse Gallery)를 개관하여 운영했다. 그의 화랑은 피카소, 미로, 샤갈, 자코메티, 뒤뷔페 등 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며 유럽의 현대미술을 미국에 뿌리내리게 한 선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갤러리는 20세기 중반 뉴욕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공간 중 하나였으며, 그는 국제 미술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모나코로 이주하여 거주하다 사망했다.
마티스의 색은 결코 칙칙하지 않아 좋다. 그는 하렘의 은밀한 관능조차도 환한 꽃밭으로 칠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머리 위에, 그는 여전히 반짝이는 색종이를 흩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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