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아래 장미 덤불 – 性을 금박으로 장식하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Rose_Bushes_under_the_Trees_Klimt.jpg?type=w773 Rose Bushes under the Trees - Klimt



클림트가 1905년 오스트리아의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 지역 호수 알터제(Attersee) 근처에서 연인 에밀리 플뢰게와 여름을 보내며 그린 풍경화다. 캔버스에 유화로 그렸으며 110 × 110 cm 크기의 정사각형 구도다. 정사각형은 클림트가 즐겨 사용한 구도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림은 색채와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점묘화와도 같이 붓질을 반복해 화면 전체가 모자이크처럼 보인다. 초록, 청록, 청색, 노랑, 흰색 장미가 어우러져 화면은 원근법이 없이 거의 평면으로 펼쳐져 있다. 색과 형태가 반복되어 리듬감 있는 패턴의 느낌을 준다. 인상주의적 표현이면서도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흰 장미는 사랑과 생명의 상징으로, 클림트의 다른 장식적 작품에도 자주 등장한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로, 빈 분리파 운동을 주도하며 아르누보 양식과 상징주의를 대표했다. 그는 금박을 활용한 화려한 장식적 작품으로 유명하며, 평생 결혼하지 않고 뮤즈였던 여성들과 교류하며 창작을 이어갔다.


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금세공사였고 어머니는 음악가의 뜻을 이루지 못한 여성으로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 자랐다.


클림트는 14세에 빈 응용미술학교(Kunstgewerbeschule)에 입학해 건축 장식화와 벽화를 공부했다. 이후 동생인 에른스트, 친구 프란츠 마취와 함께 예술가 그룹(Künstlercompagnie)를 결성하고 극장과 박물관 등의 벽화를 의뢰받아 제작했다. 와중에 빈 대학교 대강당에 그린 천장화가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이후에는 공공기관으로부터의 제작 의뢰에서 배제되었다.


1897년 보수적인 아카데미즘에 반발해 빈 분리파(Vienna Secession)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회화뿐 아니라 건축, 공예, 디자인 등을 결합한 종합예술(Gesamtkunstwerk)을 추구하고, 빈 분리파 전시를 통해 인상주의, 상징주의, 일본 미술 등 다양한 양식을 빈에 소개했다.



Klimt_-_Die_Gorgonen.jpeg?type=w773 Die Gorgonen - Klimt



그때 그가 그린 <베토벤 프리즈>는 작품은 빈 분리파 전시를 위해 제작된 대형 벽화로, 인간의 고통과 예술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높이 2.15m, 길이 34.1m의 크기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상징주의적 걸작으로, 1902년 베토벤 서거 75주년을 기념하며 열린 제14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상과 함께 전시되었다.


작품은 세 개의 주요 패널로 구성되어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흐름을 시각화한다.


좌측 패널은 행복을 향한 열망으로, 인간의 나약함과 고통을 표현하며, 강한 기사에게 행복을 간청하는 장면이다. 떠다니는 여인의 형상은 인류의 염원과 열망을 상징한다.


중앙 패널은 적대적 세력, 즉 거대한 괴물 티폰과 세 명의 고르곤 자매가 등장한다. 욕망, 방탕, 불안, 질병(당시 두려움의 대상이던 매독까지 포함)을 상징한다.


오른쪽 패널은 예술을 통한 구원을 주제로 시와 음악, 천사의 합창을 통해 인간이 궁극적으로 사랑과 행복에 도달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4악장의 ‘환희의 송가’를 재현했다.



Beethovenfries - Gustav Klimt



클림트는 이후 금박을 활용한 독창적인 장식적 작품으로 새로운 성공을 거두었는데, 대표작으로는 〈키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 〉 등이 있다.


그는 여성의 신체, 사랑, 죽음, 관능, 자연 등을 주제로 금박을 입히거나, 화려한 색채를 평면이나 곡선으로 패턴화 하는 상징주의적 그림을 발전시키며 에곤 실레 등에 영향을 주고 현대 미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The_Kiss_-_Gustav_Klimt_-_Google_Cultural_Institute.jpg?type=w773 The Kiss - Gustav Klimt



〈키스〉는 180 ×180cm의 대작으로 유화에 금박을 입혔으며, 백금이나 은 등도 사용되었다. 클림트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현재는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미술관(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에 전시되어 있다.


그림은 보이는 바와 다름없이 사랑과 관능, 인간 영혼의 결합을 상징한다. 남성은 여인의 뺨에 키스를 하고, 여인은 이를 눈을 감고 황홀한 표정으로 받아들인다.


남성의 옷은 기하학적인 사각형 패턴을 이루며, 여성의 옷은 꽃무늬의 원형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다. 깊이감 없는 금빛 배경은 인물과 장식을 돋보이게 한다. 비잔틴 모자이크나 일본풍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당시 동방의 예술에서는 금이 신성, 영원, 관능의 상징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클림트는 어린 시절 금세공사였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배운 탓에 금을 다루는데 제법 익숙했다. 또한 빈 분리파의 중심인물로 명성을 얻으면서부터는 상류층 여성들을 포함한 여러 명의 부유한 후원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주로 이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덕분에 그는 그림에 금박 같은 비싼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1908년 빈 분리파 전시에 등장한 이 작품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오스트리아 정부가 나서서 즉시 구매했다.


〈키스〉 속의 여성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였으며,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의 처형이면서 클림트의 연인으로서 평생의 동반자였던 에밀리 플뢰게라는 주장이 대세다. 그림 속 여성의 얼굴과 체형이 에밀리와 닮았다는 분석에서다. 그녀는 클림트와 30여 년간 교류하며 400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키스> 속의 여성이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에밀리가 아닌 것은 분명 하나, 클림트가 수많은 여성 모델과 연인들을 두었기 때문에 누구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클림트는 공식적으로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빈의 카사노바라고 불릴 만큼 에밀리 이외에도 모델, 하녀, 후원자 등 다양하고 수많은 여성들과 연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로부터 최소한 14명의 혼외 자식을 두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Klimt_-_Hoffnung_I_-_1903.jpeg?type=w773 Hoffnung I - Klimt


그러나 클림트의 친자로 확인된 경우는 구스타프 침머만이 유일하다. 구스타프의 어머니는 클림트의 작품 <희망 I>의 모델이었던 마리 침머만이다. 그녀는 18세 때부터 클림트와 관계를 갖고 두 아이를 낳았다. 클림트는 두 아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고 양육비를 지급했다. 두 번째 아들은 어린 나이에 일찍 사망했다.


구스타프는 성인이 되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쟁터에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아버지 클림트를 찾아가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클림트는 1918년 2월 6일 뇌졸중과 폐렴으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클림트의 유일한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며 빈에서 살다 1976년에 사망했다.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법적으로 클림트의 자식이라는 근거가 없어, 클림트로부터 어떠한 상속이나 유산을 받지 못했다. 클림트의 유산이나 경매의 상속권은 그의 형제자매나 조카들에게 주어졌다.



Gustav_Klimt_047.jpg?type=w773 Portrait der Adele Bloch-Bauer I - Klimt



클림트의 또 다른 연인으로 세간의 화제가 된 인물로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가 있다. 그녀는 빈의 유대계 은행가 집안 출신으로 남편은 설탕을 취급하는 부유한 사업가였다.


그녀는 클림트의 후원자로서 연인이 되었으며, 클림트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 〉(1907)과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I 〉(1912)의 이름으로 그녀에게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특히,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 〉은 금박을 대량으로 사용한 걸작으로, 작품성에 있어서도 ‘빈의 모나리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아델레는 1925년 사망하기 전 자신의 초상화 2점을 국립미술관에 기증하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남편 블로흐-바우어는 부인의 뜻을 존중하면서도 선뜻 기증 절차를 밟지 않고 초상화를 집안에 소유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면서, 블로흐-바우어 가문의 재산과 미술품이 나치에 의해 몰수되었는데 그중에는 아델레의 초상화도 포함되었다.


나치는 클림트의 작품인 아델레의 초상화를 ‘국민의 보물’이라고 선전하며 국립미술관에 전시하며 보관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초상화은 국립미술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아델레의 유언을 근거로 국립미술관에 있는 아델레의 초상화를 국가 소유로 간주하고 아델레의 후손에게 반환하지 않았다.


미국 시민권자인 아델레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은 1990년대 후반부터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 아델레의 초상화가 나치에 의해 불법적으로 강탈된 것이기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를 후손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우리는 외국 정부이므로 미국 법원에서 재판받을 수 없다’라는 외국주권면제법(Foreign Sovereign Immunities Act, FSIA)을 근거로 미국 법원에 응소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2004년 미국 대법원은 나치 강탈과 같은 중대한 인권이나 재산권 침해 사건은 외국주권면제법의 예외로 인정된다고 판결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정부는 2006년 아델라의 초상화를 유족에게 반환했다.


이후 아델레의 유족은 초상화를 경매에 넘겼으며, 경매에서 초상화는 당시 세계 최고가인 1억 3,500만 달러에 미국의 사업가 로널드 로더(Ronald Lauder)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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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가 그의 작품에서 표현한 사랑은 성적 행위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 태반이다.


그는 수천 점의 드로잉에서 여성의 나체와 성적 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했으며, 여성의 성기를 직접적으로 그린 것도 많다. 그래서 당시 빈 사회에서 클림트는 ‘포르노 화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는 클림트 자신의 성에 대한 자유로운 인식과 함께 일본의 춘화(春畫)나 판화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클림트의 성적 노골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다나에〉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에의 이야기를 상징한 것으로, 다나에가 아버지에 의해 탑에 갇히지만 제우스가 황금빛 비로 변해 그녀에게 스며들어 임신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재현한 것이다.


다나에는 아르고스 왕 아크리시우스의 딸이다. 아들이 없는 왕은 예언자에게 아들을 부탁했지만, 뜻밖에도 ‘외손자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게 된다. 이에, 왕은 딸 다나에가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청동 탑에 가두어 버린다.


그러나 제우스는 다나에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황금빛 비(금빛 소나기)로 변신하여 청동 탑 안으로 스며들어 다나에와 결합하고 그 결과로 다나에는 영웅 페르세우스를 낳게 된다.


왕은 다나에와 아기를 상자에 넣어 바다에 내던진다. 그러나 포세이돈이 상자를 보호해 세리포스 섬으로 인도하고, 어부 딕티스가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를 돌보게 된다.


페르세우스는 성장하여 전쟁의 영웅이 되고 창을 던져 외할아버지인 아크리시우스를 죽이게 된다.


클림트는 그림에서 다나에가 몸을 둥글게 말아 올린 자세와 제우스를 상징하는 황금빛 장식으로 제우스와 다나에가 한 몸이 되는 장면을 표현했다. 여성의 쾌락과 황홀경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Klimt_-_Danae_-_1907-08.jpeg.jpeg?type=w773 Danae - Klimt


클림트의 사랑은 다분히 성(性)적이다. 그는 성적 사랑을 비싼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성과 금(金)의 관계는 언제나 묘한 여운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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