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고다 – 불안과 고독으로 절규하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Edvard_Munch_-_Golgotha_-_MM.M.00036_-_Munch_Museum.jpg?type=w773 Golgotha - Edvard Munch


<골고다>는 에드바르드 뭉크가 1900년에 그린 유화 작품이다. 80 × 120 cm 크기로 노르웨이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Munch Museum)에 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는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로, 인간의 불안과 사랑의 고통, 죽음 같은 근원적 주제를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로 표현한 화가다.


표현주의(Expressionism)는 20세기 초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화가의 내면 감정과 심리 상태를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실적 비례나 색채를 무시하고,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과장된 붓질과 원색 사용했다.


1차 세계대전 전후의 불안한 사회적 분위기와,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소외된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한 시대적 배경을 시사한다.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이던 뢰텐(Løten)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족의 질병과 죽음으로 점철된 비극의 연속이었으며, 이는 그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가 되었다.


아버지는 빈민가에서 개업한 명성 없는 의사였고,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견뎌야 했다. 어머니는 나름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그가 5살이 되던 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가 14살 때에는 서로를 의지하고 지냈던 누나 소피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아버지와 남동생도 세상을 떠났고, 또 다른 여동생은 정신질환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되었다.


뭉크는 훗날 “질병, 광기, 죽음은 나의 요람을 지켜보며 평생을 동행한 검은 천사였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며, 누나 소피의 죽음을 그린 <병든 아이>(The Sick Child, 1885)는 그의 대표적인 초기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Edvard_Munch_-_At_the_Death_Bed.jpg?type=w773 At the Death Bed - Edvard Munch


Edvard_Munch_-_The_Angel_of_Death.jpg?type=w773 The Angel of Death - Edvard Munch


에드바르 뭉크는 젊은 시절부터 미술에 몰두하며 인상주의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파리와 베를린에서 활동하며 표현주의적 화풍을 확립했다. 그의 초기 예술의 여정은 ‘죽음과 사랑’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예술로 승화하는 과정이었다.


오슬로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 뭉크는 인물화와 풍경화를 공부하였다. 당시 노르웨이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는 사실주의적 기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1883년 오슬로 산업미술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며 처음으로 화가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의 영역을 확대할 꿈을 품고 1885년 파리로 유학했다. 파리에서 그는 고흐, 고갱, 로트레크 등 인상주의 작가들의 영향으로 강렬한 색채와 상징적 표현을 익히며 자신의 화풍을 발전시켜 갔다.


1892년 그는 베를린 미술협회 초청으로 베를린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했다. 전시한 작품들은 기존의 사실주의적 그림이 아니라 강렬한 색채와 감정을 표현한 인상주의적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베를린의 전통 화단으로부터 ‘퇴폐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화풍을 추구한 독일의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큰 영감을 주었다.


Edvard_Munch_-_Bathing_Men_-_MM.M.00706_-_Munch_Museum.jpg?type=w773 Bathing Men - Edvard Munch


그의 작품 세계에 또 다른 영향을 준 것은 그의 첫사랑인 밀리 타울로와의 서글픈 관계였다.


1885년 여름 22세 때 뭉크는 노르웨이 남부 아스가르드스트란드(Åsgårdstrand) 해변 여행에서 밀리를 만났다. 당시 밀리는 뭉크보다 3살 연상이자 유부녀였고, 후원자의 동생 부인이기도 했다. 그녀가 먼저 건넨 “저와 함께 춤추실래요?”라는 말을 계기로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두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1891년 밀리는 남편과 이혼하고 뭉크가 아닌 다른 남성과 재혼했다. 이 사건은 뭉크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그는 여성에 대해 불신과 혐오를 떨치지 못하고 살았다. 그의 이러한 아픈 사랑의 경험은 그의 <삶의 프리즈>(Frieze of Life)라는 연작에 깊이 반영되었다.


뭉크의 <삶의 프리즈>는 그가 자신의 1890년∼1900년의 22점의 작품을 마치 예술적 연대기 마냥 구성한 것으로, 작품들의 주제는 사랑-불안-죽음으로 정의되는 인간의 본질적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연작 중에는 당연히 밀리가 등장하는 애틋한 사랑의 작품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재>(Ashes, 1894)는 그의 표현주의적 상징을 강하게 품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품은 뭉크와 밀리가 숲 속에서 사랑을 나눈 직후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으나, 남자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절망과 죄책감에 빠져 있다.


화면 전체의 붉은색과 검은색의 대비는 사랑의 열정과 죄책감을 동시에 표현한다. 인물의 자세와 표정은 사실적이기보다 감정의 극단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숲 속의 배경은 은밀한 사랑의 공간이지만, 죄책감과 불안이 함께하는 비현실적인 세상이다. 사랑의 달콤함은 동시에 불안, 수치심, 파멸감을 불러옴을 암시한다.


Puberty_(1894-95)_by_Edvard_Munch.jpg?type=w773 Puberty - Edvard Munch


연작 중 사춘기(Puberty 또는 Naked Girl)는 뭉크 자신의 불안정한 어린 시절과 성적 불안, 성장의 공포가 투영된 심리적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화면에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누드 소녀가 정면을 응시하며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있다. 배경의 어두운 그림자는 불안과 공포를 상징하며 소녀의 순수함과 대비를 이룬다. 사실적 묘사라기보다는 성장기의 불안, 성적 각성과 죽음의 그림자를 상징한다.


미술적으로는 뭉크가 사실주의적 기법을 넘어 상징주의와 표현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골고다>(Golgotha)는 단순한 종교화라기보다는 뭉크 자신의 심리와 삶의 고통이 깊게 투영된 표현주의 작품이다.


그림에서 뭉크는 십자가 위의 인물을 마치 자기 자신처럼 묘사하고, 자신의 내적 고통과 죄책감을 상징하고 있다. 이 시기 그는 정신적 위기, 알코올 문제, 연인 툴라 라르센과의 파탄 등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십자가 그림과는 달리 군중의 얼굴을 전면에 크게 배치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얼굴들은 교만, 탐욕, 시기와 질투, 분노, 음욕, 탐식, 나태 등의 ‘일곱 가지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마티스, 드랭 등 야수파(Fauves) 화가들의 색채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Edvard-Munch-The-Scream.jpg?type=w773 The Scream - Edvard Munch


뭉크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극렬하게 표현한 대표작으로는 그가 1893년에 그린 <절규>(The Scream)를 꼽을 수 있다.


<절규>는 인간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표현주의 양식의 대표적 작품으로, 현대미술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화면 속의 붉게 물든 하늘과 물결치는 곡선은 불안과 혼돈을 상징한다. 입을 벌린 채 절규하는 해골 같은 얼굴은 인간 내면의 공포를 담고 있다. 이를 외면하고 무심히 지나치는 두 사람은, 절규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개인사에 불과함을 강조하고 있다.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곡선적 표현은 폭발하는 감정을 극대화하는 표현주의적 특징을 보여준다.


흔히 절규는 공포와 불안을 견디기 위해 소리치는 것을 말한다. 심한 절규는 발작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뭉크의 <절규>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다. 절규는 인간 내부의 불안과 공포의 소리가 아니라, 외부 세계가 뿜어내는 고통스러운 비명이기 때문이다.


뭉크는 실제로 그의 일기에서 ‘나는 자연을 뚫고 지나가는 커다란 절규를 들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는 세상이 내는 비명을 듣고 괴로워했다.


<절규>는 뭉크 자신의 병적 경험을 그대로 투영된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가져온 우울증과 불안, 공황장애 증상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일기와 메모에서 ‘나는 인류에게 가장 두려운 두 가지를 물려받았다. 하나는 허약함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병이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현기증, 신경쇠약, 식은땀,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을 자주 느꼈다.


1908년 알코올 중독과 극심한 불안 증세로 코펜하겐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 이후 건강을 다소 회복하긴 했지만, 그를 지배해 온 우울과 불안은 평생토록 그의 삶을 지배했다.


미술사는 <절규>를 현대인의 불안과 고립을 상징하는 ‘우리 시대의 모나리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640px-Edvard_Munch_-_Jealousy.jpg?type=w773 Jealousy - Edvard Munch


뭉크는 여러 여성들과 교제했지만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첫사랑 밀리 외에도 다그니 유엘, 툴라 라르센 등과 얽혔으나 대부분 불행하게 끝났고, 결혼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노르웨이 출신의 시인이자 예술가였던 다그니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지만, 그녀가 다른 남성과 결혼하면서 큰 상처를 입었다.


툴라는 뭉크가 가장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한 여성으로, 부유한 집안 출신의 지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결혼을 원했지만 뭉크는 끝내 결혼을 거부했다. 그녀가 뭉크에 집착한 정도는 상당히 심했던 것 같다. 어느 날 툴라는 권총을 들고 결혼을 강요하며 뭉크와 실랑이를 벌이다 권총이 발사되어 뭉크의 손가락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뭉크의 삶과 작품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뭉크는 말년에 오슬로 외곽의 에켈리 저택에서 마치 세상의 모든 비명을 차단이라도 하듯 외부와의 교류 없이 은둔과 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자화상, 풍경화, 벽화 등의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이때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한 오슬로 대학 강당의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44년 80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망 전에 자신의 소장 작품을 오슬로 시에 기증하겠다고 유언했으며, 오슬로 시는 이를 뭉크 미술관(Munch Museum)에 전시하고 있다.


뭉크는 평생의 불안과 고독을 절규로 표현했다. 절규는 소리 없는 비명이다. 절규가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이유다.


Edvard_Munch_-_Taken_by_Surprise.jpg?type=w773 Taken by Surprise - Edvard M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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