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 걸린 거리 – 혁명의 날을 유쾌하게 색칠하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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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뒤피(Raoul Dufy)가 1906년 캔버스에 유화로 그렸다. 81 × 65 cm 크기로 현재 프랑스 파리 퐁피두 센터의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다.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는 파리의 대표적인 현대 문화 복합 공간으로, 내부의 국립현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은 유럽 최대 규모의 현대미술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센터는 1977년 1월 31일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공식 개관했다. 센터는 렌초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가 설계한 ‘하이테크 건축’의 대표적인 건물로, 파이프 등의 배관 설비와 에스컬레이터를 외부로 드러나게 한 ‘안팎이 뒤집힌(in-side out)’ 디자인으로, 논란과 동시에 혁신적이고 현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센터 내의 국립현대미술관은 1977년 퐁피두 센터로 이전했다.


원래는 1947년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안에 개관했다. 팔레 드 도쿄는 이름과는 달리 일본과는 별다른 상관이 없고 단지 위치가 도쿄 애비뉴(Avenue de Tokyo)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37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박람회 이후 미술관으로 개축되어 주로 난해한 현대미술을 소장하고 전시하고 있다.


퐁피두 센터의 국립현대미술관은 현재 90개국 출신 6,400여 작가의 작품 100,000점 이상을 소장하여, 유럽에서는 최대 규모이며 세계적으로는 뉴욕의 MoMA 다음으로 큰 현대미술 컬렉션이다.


퐁피두 센터는 2025년부터 2030년까지 계획의 대규모 리노베이션을 진행하여 잠정 휴관 중이며, 동 기간 주요 작품은 파리 그랑팔레와 다른 전시 공간에서 전시되고 있다.


뒤피는 1877년 프랑스 노르망디 르아브르에서 태어났다.


르아브르는 바다와 절벽, 빛이 어우러진 노르망디 해안 도시로, 석회암 절벽이 이어지는 장대한 해안선 즉, 알바트르 해안의 대표적 풍광을 가지고 있다. 대서양과 센 강이 만나는 독특한 환경과 강렬한 태양은 당시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회화의 탄생지이기도 했다.


아버지 레옹 뒤피는 철강 회사의 회계사였지만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합창단 지휘자와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고, 어머니 마리 역시 노르망디 출신으로 가사에 성실한 여성이었다. 뒤피는 11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동생 장 뒤피(Jean Dufy)도 후에 화가가 되어 파리와 뉴욕에서 활동했다.


그는 가정 형편 때문에 14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커피 수입 회사에서 사무원으로 일했다. 사무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르아브르 항구와 배들을 계속 스케치하며 그림에 몰두했고, 아버지의 권유로 르아브르 미술학교의 야간 강좌에 등록했다. 뒤피는 이곳에서 초상화가 앵그르의 제자이기도 한 샤를 르이예(Charles Lhuillier) 선생을 만나 드로잉과 수채화의 기초를 탄탄히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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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뒤피는 군 복무를 마친 뒤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올라와 국립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서 공부하며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미술학교에서 드로잉과 구도 훈련에 집중했으며, 초기에는 모네와 피사로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풍경화를 즐겨 그렸다. 특히 고향 르아브르의 항구 풍경과 바다는 뒤피의 초기 수채화와 풍경화의 주요 소재가 되었고.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음악적 취향을 회상하며 음악회나 오케스트라 장면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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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피는 1905년 독립 전시회(Salon des Indépendants)에서 앙리 마티스의 <사치, 평온 그리고 관능>(Luxe, Calme et Volupté)이라는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강렬한 색채와 자유로운 붓질의 이런 작품은 그가 미술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아카데미적 화풍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미술의 세계였다.


그는 마티스, 앙드레 드랭 등을 직접 찾아가 친분을 쌓고, 야수파(Fauvism)가 지향하는 색채와 형태를 배워가기 시작했다. 그의 새로운 화풍은 르아브르 항구뿐만 아니라 파리나 니스의 도시 생활을 주제로 했다. 그는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색으로 기념일과 축제의 활기차고 자유로운 느낌을 경쾌하게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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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피는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의 해외 전시 활동도 활발히 추진하며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쌓아갔다.


1920~30년대에 런던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며 도시 생활이나 해변 풍경 같은 작품을 선보였다. 영국 관객들에게 그의 밝고 경쾌한 색채가 큰 호응을 얻었다. 스위스 루체른에서도 여러 번 전시회를 열어, 알프스 지역의 관객들에게 프랑스적 색채와 대서양의 분위기를 전달하기도 했다.


1930년대 이후 뉴욕 갤러리와 아트 페어에서 그의 작품이 소개되며 미국 미술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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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피는 프랑스 정부 차원의 예술 사업에도 참여하며 공공 예술분야의 장인으로서의 명성을 얻기도 했다. 1937년 파리 국제박람회에서 제작한 대형 벽화 〈전기의 요정>(La Fée Électricité)는 국가적 후원으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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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는 국제 그랑프리(Grand Prix International)를 수상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11년 에밀리엔 이라는 이름의 지적이고 성실한 여성과 결혼하여 죽는 날까지 함께 살았다. 그녀는 뒤피의 가장 신뢰할 만한 모델이기도 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여인〉(La Dame en rose)은 뒤피가 그녀를 그린 작품으로, 고흐와 고갱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색채와 윤곽선 속에 그녀의 존재가 담겨 있다. 그는 동시대의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별다른 스캔들 없이 안정된 가정생활과 작품 생활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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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폴 푸아레(Paul Poiret) 같은 유명 패션 디자이너와 협업하여 직물 디자인을 제작하고, 도서 삽화, 무대 장치, 도자기, 가구 장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동하며 상당한 수입을 올려 경제적으로도 다소 여유 있는 생활이 가능했다.


뒤피는 말년에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손과 관절이 굳었지만 붓을 손에 묶어가며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작품을 지속했다.


그는 1953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포르칼키에(Forcalquier)에서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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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가 걸린 거리>는 뒤피가 고향 르아브르에서 프랑스 국경일 장면을 그린 것이다.



화면 전경에 프랑스 국기를 크게 배치하여 평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인상주의적 원근법과 대비되는 실험적 시도였다. 녹색과 분홍색으로 표현된 건물과 대비되는 삼색기, 강렬한 색채의 대비가 야수파적 특징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이 자품이 클로드 모네의 <파리 몽토르괴유 거리, 1878년 6월 30일 축제>〈 Rue Montorgueil, Paris, fête du 30 juin 1878)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평가한다.


모네가 그린 1878년 6월 30일의 축제는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를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파리 만국박람회는 전 세계에 프랑스 공화국의 힘과 통합을 보여주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6월 30일의 개막일에는 도시 전체가 청, 홍, 백의 삼색기로 물들고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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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일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갈등 상황에서 프랑스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한 프랑스혁명의 상징적 시작점이었다.


1774년 즉위한 루이 16세 왕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1775년 시작된 미국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전쟁에서 미국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1781년 프랑스의 해군과 육군은 버지니아의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을 무찌르며 미국의 승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지원은 프랑스 재정 상황을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이에, 루이 16세 왕은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평민들에게 불공평한 조세 제도를 강요했다. 특히 프랑스 전역에서 필수품으로 판매되는 소금에 대한 세금(Gabelle)은 지역마다 세율이 크게 달라, 어떤 지역의 소금 가격은 다른 지역보다 몇 배나 비쌌으며, 비싼 세금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최소량의 소금을 의무적으로 구매해야 했다.


또한,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대부분의 세금에서 면제되거나 아주 적은 세금만 냈으나, 제3신분(평민)은 토지세, 인두세 등 직접세와 소금세, 소비세 등 간접세를 모두 부담해야 했다. 와중에 몇 년 간 지속된 흉작으로 빵값이 폭등했다.


1789년 5월 루이 16세 왕은 세금 문제를 논의하여 재정 상황을 해소할 목적으로 삼부회(Estates-General)를 소집했다. 그러나 삼부회에 참석한 제3신분(평민) 대표들은 왕의 제안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를 결성하는 한편, 세금 제도 개혁 등 평민들의 권익을 보장할 방안을 제시하며 국왕이 이를 수용해 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루이 16세 왕은 회의장을 봉쇄하고 제3신분 대표들이 회의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지했으며, 이에 제3신분 대표들은 근처의 실내 테니스 코드에 모여 헌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하며 국왕이 이를 수용할 때까지 농성에 들어간다고 선언했다(테니스 코트 선언). 파리의 평민들이 이에 동조하며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국왕은 파리 주변에 3만 명의 군대를 집결시켜 이를 무력으로 진압할 태세를 갖추었다.


1789년 7월 14일 아침, 약 900명의 파리 주민들은 국왕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화약과 무기를 확보할 목적으로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갔다. 주민들은 감옥을 방어하는 국왕 군대와 4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결국 감옥을 장악하고 감옥 소장 드 라네를 처형했다. 혁명의 시작이었다.


뒤피는 혁명 기념일을 그렸으나 결코 정치나 역사를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날의 즐겁고 유쾌함을 강한 색으로 자유롭게 칠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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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뒤피가 세상을 떠난 뒤, 부인 에밀리엔은 남편의 아틀리에에 남아 있던 2,000여 점의 작품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그녀는 남편의 작품으로 부를 축적하기보다는 후세가 자유롭게 경험하고 즐길 수 있는 공공의 유산으로 내놓은 것이다.


뒤피의 작품과 함께 에밀리엔 뒤피의 아름다운 심성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을 보다 풍성하고 유쾌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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