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 일당의 처벌 – 모세가 하늘의 심판을 부르다

명작을 찾아 이탈리아를 뒤지다

by 다두



The Punishment of Korah and the Stoning of Moses and Aaron - Botticcelli Sandro



보티첼리가 1481-1482년에 그린 <고라 일당의 처벌>(Punishment of Core, Dathan and Abiron)은 시스티나 성당 벽화 가운데에서도 가장 정치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고라(Core), 다단(Dathan), 아비롱(Abiron)이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반역하다가 땅이 갈라져 삼켜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민수기 16장의 기록은 이렇다.


유대 12지파 중 성막 보호를 담당하는 레위 지파(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의 후손)의 고라와 야곱의 첫째 아들 후손인 르우벤 지파의 다단과 아비롱이 그들을 지지하는 250명의 유력 인사들과 함께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다.


모세는 레위 지파였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출애굽을 이끈 정치적 지도자였고, 그의 형 아론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제사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고라와 일당 등은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만 거룩하냐?”, “왜 너희가 우리 위에 군림하느냐?”,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거룩한데 왜 지도자는 너희뿐이냐?”라고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모세는 이 반기를 자신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하고 이렇게 제안했다. “하느님이 누구를 택하셨는지 내일 향로를 들고 나와보라.” 이는 ‘하느님이 직접 지도자를 선택하실 것이다’라는 모세의 확신에 찬 선언이었다.


다음날 고라, 다단과 아비롱이 250명의 지지자들과 향로를 들고 나왔을 때 땅이 갈라지고 하늘에서부터 불이 내려왔다. 고라와 그의 일당은 하느님이 내린 불 덩이에 모두 태워졌다. 다단과 아비롱의 무리들은 가족과 재산까지도 갈라진 땅속으로 추락했다. 하느님이 선택하지 않은 권위는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하느님이 인정한 지도자임이 증명되었다.


반역 사건 이후, 하느님은 아론의 마른나무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즉, 제사장직은 아론 가문에게만 주어진 것이며, 이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임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보티첼리는 이 사건을 세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하나의 화면에 배치했다.


화면 중앙에는 땅이 갈라져 다단과 아비농의 반역자들이 삼켜지는 장면을 그렸다. 모세는 손을 들어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군중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며 뒤를 돌아본다. 화면 좌측은 고라의 무리가 불에 타 죽는 장면이다. 향로를 든 제사장들이 불에 휩싸인다. (보티첼리의 화풍이 워낙에 부드럽고 우화함을 추구하다 보니, 강렬한 화재나 땅 꺼짐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화면 오른쪽 뒤로는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 큰 나무로 성장한 기적을 그렸다.


이 작품 역시 식스투스 4세 교황의 의도에 따라 페루지노의 <예수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건네다>와 마찬가지로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졌다.


식스투스 4세 교황은 작품들을 통해 모세에서 베드로로, 베드로에서 교황으로 계승되는 교회의 권위를 시각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교황의 권위는 모세와 베드로의 그것과 같이 인간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선택하고 부여한 것으로서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언제라도 하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것이다.


보티첼리는 화면 중앙 뒤에 거대한 개선문을 배치했다. 이 개선문은 실제 로마의 특정 건축물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티투스의 개선문과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을 섞은 듯한, 보티첼리 머릿속의 상징적 건축물인 것으로 해석된다.


개선문은 고대 로마에 세워진 전통적인 승전 기념 건축물로 어느 하나를 지칭하기보다는 여러 계기에 각기 다른 형태로 여러 곳에 세워졌다.


티투스의 개선문은 81년경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가 형 티투스(Titus)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로마의 가장 중심지에 세웠다. 티투스가 서기 70년 유대와의 전쟁에 참여하여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티투스 개선문의 내부 부조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메노라(일곱 가지 촛대)를 빼앗아 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티투스 개선문은 이후 수많은 로마 개선문의 모델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I) 황제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서기 312년)에서 승리하여 명실공히 서방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315년에 콜로세움(Colosseum) 바로 옆에 세워졌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 공인을 앞둔 시기에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는 상징물로써 건립한 것이다.


이처럼 개선문은 로마 제국의 군사적 승리와 정치적 정당성을 상징한 것이었다. 보티첼리가 교황궁의 벽화에 개선문을 그려 넣은 것은 정치적으로는 교황이 로마 제국의 권위와 영광을 계승하고 있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다. 특히, 하느님이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이들을 심판하는 무대를 개선문 앞 광장으로 묘사한 것은 종교적 서사에 정치적 메시지를 가미한 절묘한 효과를 의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산드로 보티첼리는 1445년 피렌체의 장인 가문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에는 가업을 이을 생각으로 금세공 기술을 배웠다. 이후 리피(Fra Filippo Lippi)에게서 본격적으로 회화를 공부하며 리피 특유의 부드러운 선과 우아한 인물 표현 방법을 전수받았다


그는 이미 20대 중반에 차츰 명성을 얻으며 스승으로부터 독립하였고, 결국 피렌체의 최고 권력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일명 ‘위대한 로렌초’)의 후원을 받아 메디치 궁정의 문화 감독과도 같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신화를 소제로 한 〈비너스의 탄생>, 〈프리마베라〉등을 발표하며 피렌체 르네상스의 우아함과 지적 세련미를 대표하는 화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La nascita di Venere - Sandro Botticelli



와중에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새롭게 건축한 시스티나 성당 장식을 위해 당대 이탈리아의 대표적 화가들을 교황궁으로 불러들였는데, 피렌체의 로렌초 데 메디치는 그간 교황과의 갈등을 화해할 목적으로 자신이 아끼는 궁정화가인 보티첼리를 교황에게 파견해 주었던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 벽화 작업에 참여한 보티첼리는 〈고라 일당에 대한 처벌〉외에도 〈모세의 생애 중 장면〉, 〈예수의 유혹〉 등을 그리며 교황의 정치적 종교적 권위와 정당성을 강화하는데 크게 활약하였다.


이처럼 교황의 총애를 받으며 시스티나 성당 작품에 몰두하던 보티첼리에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우연히 도미니코 수도원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수사를 만난 일이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1452년 이탈리아 페라라 출신으로 금욕주의와 기도 생활에 철저한 도미니코회 수도사로서 당시 교회와 피렌체 사회의 부패와 사치 도덕적 타락을 강하게 비판하며 대중 설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설교는 매우 강렬하고 마치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함께 하여 급속도로 대중의 호응을 얻게 되어 피렌체의 민심을 들썩이게 했다.


그는‘허영의 화형’(Bonfire of the Vanities)이라는 제목의 의식을 열어 사치품과 화려한 옷, 장신구, 예술품 등을 영혼을 타락시키는 허영이라며 광장에서 불태웠다. 피렌체 시민들에게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강요하기도 했다.


보티첼리도 그의 설교에 깊이 공감하고 <비너스>와 같은 신화적 주제의 작품을 그리기보다는 보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일부 전기에서는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허영의 화형식에 자신의 과거 작품을 던져 불태워 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494년 메디치 가문이 몰락하자 사보나롤라는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피렌체를 신정(神政) 공화국처럼 이끌며 술집을 폐쇄하고 도박과 춤 노래 등을 금지시키는 종교적 규율을 강요했다.


또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부패했다고 비난하며 교황의 권위에도 도전했다.


결국 사보나롤라는 교회와 피렌체 정부의 공동 재판에서 이단(heresy), 선동(sedition), 거짓 예언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파문되어 교수형에 처해진 후 화형 되었다. 그의 유해는 추종자들의 후사를 우려해 아르노 강에 흔적 없이 뿌려지고 말았다.


사보나롤라가 처형된 후 보티첼리도 예전의 명성을 완전히 잃게 되고 후진들에게 밀려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말년을 보내다 1510년 조용히 사망했다.


<고라 일당에 대한 처벌>의 화면 왼쪽에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땅속에 묻히고 불태워지는 장면을 놀라울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는 젊은이의 모습이 있다. 혹독한 심판의 장면을 3자 적 입장에서 관찰하는 듯한 이 젊은이의 정체는 보티첼리 자신일 수도 있다.


그는 하느님의 심판을 그리면서 이미 사보나롤라에 엮여 함께 몰락할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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