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 – 베드로의 후계자 교황의 권위를 그리다

명작을 찾아 이탈리아를 뒤지다

by 다두



Entrega de las llaves a San Pedro - Perugino



<예수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건네다>(The Delivery of the Keys)는 페루지노(Pietro Perugino)가 1481–1482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새로 지은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로 그렸다.


이 작품은 마태복음 16장을 시각화한 것으로, 예수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라’라고 선언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와 제자들은 가이사랴 지역의 빌립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이곳은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고 이방인의 신전이 공존하던 곳으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자신과 기독교의 근본에 관한 문답을 나누게 되었다.


예수가 먼저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 중 베드로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이는 신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바위를 뜻하는 단어로, 예수는 베드로에게 교회의 기초가 될 사명을 부여한 것이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가 말한 천국의 열쇠는 하느님을 대신한 가르침의 권위, 용서와 징계의 권한,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 갈 책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후 교회 역사에서 교황권의 신학적 근거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작품의 중앙에는 예수가 무릎을 꿇은 베드로에게 은색과 금색의 열쇠를 건네고 있다. 은색의 열쇠는 지상에서의 속죄의 권한을 의미하며, 금색의 열쇠는 천상의 권위를 상징한다.


예수와 베드로의 주변에는 열두 제자와 현세(페루지노가 이 그림을 그리는 당시)의 주요 인물들이 이 성스러운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 제자들 이외에 등장하는 당대의 인물로는 나폴리의 왕 알폰소 2세(Alfonso II of Naples)와 교황궁 주요 인사들, 그리고 성당 장식 작업에 참여한 화가들과 후원자들이다. 이들은 작품 속에서 후광이 없는 모습으로, 후광이 있는 사도들과는 구분되어 보인다. 화면 오른쪽 끝에서 다섯 번째의 인물은 이 작품을 그린 페루지노 자신의 모습이다.


작품에서 사도들과 함께 있는 현세의 인물로서 가장 눈에 띄는 이는 나폴리의 군주 알폰소 2세(Alfonso II of Naples)다. 그는 15세기 후반 이탈리아 정치 군사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부왕 페르디난도 1세 사후 짧은 기간이나마 나폴리 왕국을 강력하게 통치하고, 화려한 르네상스 문예를 후원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알폰소 2세 왕자는 젊은 시절부터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지휘했다. 특히, 교황 식스투스 4세와 함께 피렌체 전쟁(1478–1480)을 주도한 것으로 명성이 높다.


피렌체 전쟁은 파치 음모 사건(Pazzi Conspiracy)이라는 피렌체 내부 정변의 결과로써, 교황과 나폴리 왕국이 연합하여 피렌체를 공격한 전쟁이다.


파치 음모 사건이란 당시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메디치 가문에 대해 라이벌인 파치 가문이 일으킨 일종의 쿠데타 사건이었다.


당시 피렌체는 은행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르네상스 예술을 후원한 전통의 메디치 가문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 못지않은 명문 가문인 파치 가문은 메디치 가문이 자신들을 배제하고 피렌체의 권력을 독점하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478년 4월 26일 피렌체 대성당(두오모)에서 부활절 미사 중, 파치 가문의 일원이 메디치 가문의 최고 권력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암살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다. 줄리아노는 파치 가문의 자객에 의해 칼에 찔려 현장에서 즉사하고, 로렌초는 얼굴과 팔에 상처를 입었지만 극적으로 성당을 탈출하여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당시 피렌체 시민들은 전적으로 메디치 가문을 지지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메디치 가문과의 공조로 암살의 배후를 체포하여 현장에서 처형하고, 파치 가문의 핵심 인물들을 붙잡아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파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이후에는 가문의 이름조차 사용이 금지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그간 파치 가문에 우호적이었던 교황궁 인사들도 피렌체에서 추방했다.


당시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는 메디치 가문과 불편한 관계로, 은연중에 파치 가문과의 협력을 시도하고 있었다.


교황은 메디치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에 교황궁의 회계 업무를 맡기고 있었는데, 은행은 간혹 교황의 자의적인 지시에 순종하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다. 특히, 식스투스 4세 교황은 교황궁의 예산으로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에게 이몰라(Imola)라는 도시를 사주려 했는데 메디치 가문의 은행이 이를 거부하면서 교황과 메디치 가문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식스투스 4세 교황은 회계 업무를 파치 가문에게 넘기고 싶어 했으나 메디치 가문은 이를 거부했다.


더욱이 강력한 부와 문화적 유산(예술)을 누리던 메디치 가문은 교황의 의사에 반해 피렌체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며 은연중에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위세를 보이기도 했다.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파치 가문에 대해 극악한 보복을 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식스투스 4세 교황은 크게 분노하고, 이참에 메디치 가문을 강하게 몰아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평소 메디치 가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 왕에게 피렌체를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이탈리아 남부의 강국인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 왕은 그렇지 않아도 이탈리아 북부의 경제 중심지인 피렌체를 항상 경계하고 있던 차에, 피렌체를 공격하자는 교황의 제안을 수용하여 알폰소 2세 왕자를 앞세워 군사를 일으켜 피렌체를 공격토록 하였다.


연합군의 공격으로 고립의 위기에 처한 피렌체는 로렌초 데 메디치가 직접 나폴리로 가서 페르디난도 1세 왕과 외교적 협상을 진행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나폴리가 즉각 군대를 철수하고 포로들을 석방해 주기를 요구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피렌체가 기존의 반(反) 나폴리 노선을 버리고 나폴리 왕국과 우호 협력 관계를 회복할 것과, 특히, 피렌체가 전통적인 나폴리-밀라노 동맹을 방해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피렌체가 교황의 권위에 순응하고 교황의 업무에 적극 협조하기를 요구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페르디난도 1세의 요구를 수용하였으며, 페르디난도 1세는 더 이상의 공격을 중지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결국 나폴리는 교황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피렌체와의 경제적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며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는 강국으로의 입지를 확립하였다. 전쟁의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한 로렌초 데 메디치는 피렌체에서‘위대한 로렌초’라는 명성을 얻으며 피렌체에서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탈리아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전쟁 후 알폰소 2세는 교황궁을 방문하고 식스투스 4세 교황의 시스티나 성당을 둘러보았다. 그는 군인일 뿐 아니라 예술의 강력한 후원자로서 이미 나폴리를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정비하고 있었던 만큼, 교황의 시스티나 성당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가진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페루지노는 이 작품에 사도들과 함께 현세의 인물인 알폰소 2세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페루지노의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건네다>라는 작품은 회화적으로도 르네상스 원근법의 교과서라 불릴 만큼 완벽한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면의 중앙에는 알베르티의 이상적 건축을 연상시키는 돔형 성전이 자리한다. 양쪽에는 로마 개선문이 배치되어 고전적 균형미를 형성한다. 바닥의 대리석 패턴은 깊은 공간감을 만들며, 인물들은 수평선 아래에 배치되어 안정적 구도를 완성한다. 이 명확하고 조화로운 공간 구성은 이후 라파엘로 등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페루지노가 작품의 양옆으로 개선문 배경을 그린 것은 예수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또 다른 사건을 그려 넣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장면의 사건은 마태복음 22장 15-22절의 예수의 ‘세금 문제 논쟁’(Tribute Money)이다.


유대인 중에서도 특히 율법에 철저한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다가와 동전(데나리온)을 보여주며 질문했다. “카이사르(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이 질문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정치적 질문이었다.


예수가 동전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카이사르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


작품의 우측 개선문 앞 장면은 좌측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생애 중 또 다른 사건을 작게 삽입한 보조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은 일부의 이견이 있기는 하나 미술사학계의 다수는 예수의 돌 세례(Stone-throwing episode) 사건을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가 군중에게 둘러싸여 여러 가지 시험을 받는 사건을 종합적으로 묘사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돌 세례의 대표적인 사례는 요한복음 8장의 군중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려와 예수에게 돌로 칠지를 묻는 장면이다. 군중들이 여인을 돌로 치려 하면서 예수의 판단을 묻는 이야기다. 이에 예수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답하였다.


작품의 좌우에 묘사된 예수와 관련된 두 사건은 작품의 본 장면인 예수가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사건의 권위와 정당성을 보완하고 강조할 목적으로 삽입된 것이다.


이 작품이 제작된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교황궁을 확장하면서 새로 지은 건물이다. 이름의 시스티나(Sistina)도 바로 이 교황의 이름 Sixtus에서 온 것이다. 교황은 기존 교황궁의 낡은 예배당이 너무 낡고 위험하여 완전히 허물어 버리고 그 터에 시스티나 성당을 세웠다.


설계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 조반니 데이 돌치(Giovanni dei Dolci)가 한 것으로, 교황궁과 다름없이 요새처럼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양식을 취하였다.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궁 내부의 핵심 의식 공간으로서, 교황이 직접 미사를 집전하고, 주요 축일이나 즉위식, 대관식 등 중요한 의식을 행하며, 교황권의 정치적 무대로서 외국 사절을 맞이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1492년 이후에는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 장소로도 활용되어, 시스티나 성당은 새 교황이 탄생하는 방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따라서 시스티나 성당의 <예수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건네다>라는 벽화는 ‘예수는 베드로에게 교회의 권위를 부여했으며,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회의 권위를 계승한다’라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Baptism of Christ - Pietro Perugino



페루지노(본명 Pietro Vannucci, 1446/1452경–1523)는 움브리아 지역 치타 델라 피에베(Città della Pieve)에서 출생했다. 페루지노라는 이름은 페루자(Perugia) 출신이라는 뜻에서 붙은 별명이다. 그는 어린 시절 비교적 안정된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르네상스 최고의 화가들이 모인 피렌체의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공방에서 수학했다. 당시 공방에서 그와 함께 그림을 그린 동료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기를란다요, 로렌초 디 크레디, 필리피노 리피 등이 있다. 페루지노는 이 공방에서 원근법과 부드러운 색채 조화를 익혔고, 이는 그의 대표적 스타일이 되었다.


페루지노는 라파엘로의 스승이기도 했다.


1483년 라파엘로가 우르비노에서 태어났을 때 페루지노는 이미 움브리아 지역의 대표적인 화가였다. 라파엘로는 10대 초반이던 시기에 천재성을 보였고 자연스럽게 페루지노의 공방에 들어가 수학하며 페루지노의 작업을 보조했다.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에게서 대칭적 구도와 부드러운 색채의 조화법, 고요한 분위기와 우아한 제스처 등을 배웠다. 라파엘로의 그림은 페루지노의 작품과 거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해지며 성숙해 갔다.


1500년경 라파엘로는 17세의 나이로 페루지노의 지도를 완수한 ‘마에스트로(독립 화가)’로 인정받으며, 더 세련되고 유려한 자신의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라파엘로가 워낙에 큰 명성을 얻게 되면서,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로 불리던 스승 페루지노의 명성은 다소 뒷전으로 밀렸다. 미켈란젤로도 페루지노가 라파엘로보다 훨씬 ‘대단하다’라는 평가를 내기도 했다.


페루지노는 말년까지도 꾸준히 작업을 계속하다, 1523년 페루자 근교 폰티냐노(Fontignano)에서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르네상스 문화의 위대한 후원자 식스투스 4세 교황은 시스티나 성당을 세웠고,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 페루지노는 그곳에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완성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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