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슬로 협정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출범하다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본다

by 다두


1993년 9월 13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이스라엘 이츠하키 라빈 총리와 PLO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이 오슬로 협정(Oslo I Accord)에 서명했다. 협정의 공식 명칭은 ‘임시 자치 협약에 관한 원칙 선언’ (Declaration of Principles on Interim Self-Government Arrangements)이다. 협정의 핵심은 PLO가 국가 수립 이전의 잠정 단계로 자치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임시 자치 협약에 관한 원칙 선언을 오슬로 협정이라 부르는 이유는 협상이 진행된 장소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였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정부는 1992년부터 오슬로 근교의 외딴 숲속 고성을 이스라엘과 PLO의 비밀협상 장소로 제공했다. 이스라엘과 PLO 대표들은 이곳에서 최소 14번 이상 비밀리에 회동하고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은 초기 양측의 학술 토론회 형식으로 시작했다. 양측은 학술적 의제를 두고 자유롭게 토론하며 신뢰를 구축한 후에 차츰 정치적 현안에 관한 협상으로 진전해 나갔다.


노르웨이 외교관 모나 율과 그녀의 남편 테레예 로드-라르센은 양측 협상 대표들을 지원하며 현장을 관리했다. 서로 간의 대화가 너무 격해질 때는 휴식을 제안하고 다양한 방식의 친교 활동을 유도하여 분위기를 다듬었다. 모나 율 부부는 간식으로 자신들이 만든 노르웨이 전통 와플을 제공했다. 모나 율은 ‘배고픈 사람에게 협상은 없다’는 협상의 기본에 충실했던 것이다.


협정은 이스라엘과 PLO 간의 묵은 숙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성과를 이루었다.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유일한 대표 기구로 인정한다.

PLO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고 폭력 행위를 포기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를 수립하고, 자치정부는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일부 지역에서 자치권을 행사한다.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 대한 교육, 보건, 경찰, 복지 등 행정권을 자치정부에 이양한다.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예리코의 일부 지역에서 철수한다.

자치정부에 관한 최종 지위는 5년 후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 예루살렘 문제, 난민, 정착촌, 경제협력, 선거 문제 등에 관해서도 최종 지위 협상에서 논의한다.


오슬로 협정에 대한 이스라엘 내부의 반응은 상반됐다. 중도 좌파 세력은 협정이 평화와 안보를 위한 현실적 선택으로, 외교적 고립에서 탈피하고 역내외 국가와의 경제 협력을 확대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지지했다. 그러나 극우 세력과 정착촌 건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협정이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수립의 기초를 제공한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PLO 내부적으로도 의견이 엇갈렸다. 온건 세력은 팔레스타인인의 자치권과 정치적 독립을 위한 첫걸음이라며 적극 환영했다. 반면, 하마스 등 급진 무장 단체는 이스라엘과의 협상 자체를 배신행위로 간주하고 협정은 무효이며 무력 투쟁은 계속될 것이라 선언했다.


PLO는 이스라엘에 대한 폭력 행위를 포기한다는 협정문에 따라 1차 인티파다의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을 반대하는 폭력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1994년 2월 예루살렘 남쪽 헤브론에 있는 아브라함 사원에서 미국 출신 유대인 정착민 바루흐 골드스타인이 오슬로 협정을 반대한다며 라마단 금요 예배 중인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을 향해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무슬림 예배자 2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125명이 부상했다. 골드스타인은 다른 예배자들에 의해 제압되어 구타당해 사망했다.


PLO는 이 사건을 ‘오슬로 협정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불신감을 표명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전역에서 항의 시위를 전개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 급진 무장 단체는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 테러를 예고했다.


1994년 4월 이스라엘 북부 도시 아풀라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하마스 소속의 19세 소년 라에드 자카르나가 175kg의 폭약을 실은 차량을 돌진시켜 유대인 8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했다. 하마스는 자카르나의 자폭 공격이 오슬로 협정을 거부하고, 헤브론 사원 학살에 대한 보복의 메시지로 자신들의 소행임을 자인했다.


바로 며칠 후에는 이스라엘 북부 하데라의 버스 정류장에서 하마스 소속 청년이 폭탄 조끼를 착용한 채 군중 속에서 자폭했다. 주변의 유대인 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 하마스는 이 사건 역시 헤브론 사원 학살 사건에 대한 보복과 오슬로 협정을 반대하는 정당한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하마스는 이러한 일련의 자살 공격을 ‘순교 작전’이라고 명명했다.


이 같은 반대와 폭력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과 PLO가 처음으로 서로를 공식 인정하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각각 독립 국가로서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원칙, 즉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을 확인하고 임시 조치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하기로 한 것은 진일보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1994년 노벨 위원회는 오슬로 협정에 참여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교장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에게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여했다. 노벨 위원회는 이 수상이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스라엘 사람과 팔레스타인 사람 모두에게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축하했다.


노벨 평화상이 발표된 직후 국제 사회는 수상자 명단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제외되고 페레스 외교장관이 포함된 것을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의 설계자이자 실질적 조율사로서의 페레스 외교장관의 탁월한 외교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출범


PLO는 오슬로 협정에 따라 자치정부를 출범시켰다.


1994년 5월 PLO는 예루살렘 북쪽의 라말라를 행정수도로 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PNA)의 출범을 선언하고 아라파트 의장을 자치정부 수반으로 추대했다.


아라파트 의장은 1967년 6일 전쟁으로 시작된 27년간의 요르단-레바논-튀니지로 이어진 고난의 망명 활동을 청산하고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이라는 꿈같은 성취를 이룩했다. 팔레스타인인 수천 명이 이집트와의 국경 라파 검문소에 모여 ‘영웅의 귀환’을 환영했다. 검문소를 통과하고 가자 땅을 밟은 아라파트 수반은 ‘나는 조국을 다시 보겠다는 열망으로 살아왔다’라며 감격했다.


아라파트 수반은 라말라의 무카타(Muqata'a)를 자치정부 청사로 정하고 집무를 시작했다. 무카타는 1차 세계 대전 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할 당시 영국군이 건설한 군사 시설이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이라는 멀고도 험난한 과제를 안고 이렇게 시작했다.


그러나 자치정부의 권한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외교 국방은 물론이고 행정, 교육, 보건, 경찰 등 주요 분야에서 여전히 점령군으로서 실질적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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