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 데스테–편지 외교로 르네상스를 지키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Ritratto di Isabella d'Este - Leonardo da Vinci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종이에 초크와 파스텔로 그렸다. 63cm x 46cm의 그리 크지 않은 작품으로 루브르 드농관에 전시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1452년 토스카나의 빈치 마을에서 출생했다. 시골에서 자란 그는 동물, 식물, 물의 흐름, 빛의 변화 등을 관찰하며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고, 글을 배우기보다는 그림과 스케치에 몰두했다.


1466년경 14세의 나이에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입문하여 회화와 조각은 물론이고, 기계 설계, 금속 세공, 해부학 등 다양한 기술을 배웠다. 그는 공방에서 스승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천사의 얼굴을 도맡아 그렸는데 그 표현력이 너무나 뛰어나 이후 베로키오가 더 이상 붓을 잡지 않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레오나르도는 1482년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초청으로 그의 궁정 화가로 입성하여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법인 기하학적 구도와 원근법을 도입하고 인물의 표정과 심리를 깊이 있게 묘사하며, <암굴의 성모>, <최후의 만찬> 등 명작을 제작했다.


1516년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이주하여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열풍을 프랑스에 전파하는 선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말년에는 루아르 강변의 앙부아즈에서 여생을 보내며 프랑스의 후학들을 지도했다. 그의 유명한 <모나리자>는 이 시기에 완성한 것이다.


La Joconde - Leonardo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의 왕권을 강화하고 문화적 권위를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1515년 아버지 샤를 드 발루아가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한 그는 1516년 로마 교황 레오 10세와 볼로냐 협약(Concordat of Bologna)을 체결하고 교황으로부터 프랑스 내의 성직자 임명권을 빼앗았는데, 이는 프랑스 왕권을 강화하고 교황권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 왕실의 문화적 전통을 수립하고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사상과 예술을 프랑스로 들여와 적극 후원하였는데, 이런 계기로 레오나르도를 초청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의 지적 능력을 충분히 활용한 융합형 인물이었다. 그는 예술, 과학, 해부학, 공학, 건축, 음악, 철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인간의 지식과 창조의 경계를 끊임없이 넓혀 나갔다.


그는 회화에서 색과 음영을 부드럽게 혼합한 듯한 붓 터치로 대상 인물의 미묘한 감정과 표정을 살아 숨 쉬듯 재현하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창안했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에도 각 인물의 얼굴을 같은 상황에서 같은 감정과 내면을 가진 실제 모델을 통해 그대로 표현하려 했다. 특히 예수와 유다, 이 두 인물의 얼굴을 가장 공들여 찾았는데, 예수의 얼굴은 순수하고 고결한 인상을 가진 젊은 청년을 모델로 삼았으나 배신자로서 교묘하고 어두운 인상을 가진 유다의 얼굴은 쉽게 찾지 못했다 한다. 그는 도시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악인을 대상으로 유다를 찾아 헤맸는데, 결국 술에 취해 쓰러진 한 남자를 발견하고 그의 얼굴에서 유다를 그려냈다. 그런데 그림이 완성된 후, 그 남자가 다 빈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선생님,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저는 몇 년 전 예수의 모델이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레오나르도는 같은 사람의 다른 얼굴에서 순수한 예수의 표정과 유다의 배신을 모두 찾아낸 것이었다. 인간 내면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기도 했다.


Leonardo_da_Vinci_-_The_Last_Supper_high_res.jpg?type=w773 Il Cenacolo - Leonardo


레오나르도가 과학자라고도 불리는 이유는 해부학 연구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시신을 해부하며 인체 구조를 정밀하게 기록했다.


흔히 레오나르도의 해부학적 인체 드로잉을 <비트루비우스적 인간(Vitruvian Man)>이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고대 과학자 비트루비우스 폴리오의 이론을 그림으로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Marcus Vitruvius Pollio)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의 건축가이자 기술자였다. 그는 저서 <건축에 관하여>(De Architectura)에서 인간의 신체 비례가 이상적인 건축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완벽한 인간은 양팔을 벌렸을 때 그 길이가 키와 같을 뿐만 아니라 배꼽을 중심으로 원과 정사각형을 그리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인체 드로잉은 이 같은 인물을 균형과 비례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물질세계(정사각형)와 신성한 세계(원)를 연결하는 존재라는 철학적 메시지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L'uomo vitruviano - Leonardo

그는 또한 헬리콥터, 전차, 잠수함 등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기계들을 설계했다. 대부분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당시 아이디어 자체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자연을 단순히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원리를 이해하고 재현하려는 태도를 가졌다. 그는 예술이란 ‘자연의 법칙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믿었으며, 과학적 탐구와 미적 감각을 예술에 결합한 최초의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이사벨라 데스테>는 제목에서와 같이 이사벨라라는 여성의 의뢰로 그린 인물화인데 채 완성되지 못하고 밑그림 자체로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이 완성되지 못한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긴 하나, 가장 유력한 설은 작품의 의뢰자인 이사벨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더 이상 그리기를 중단시켰다는 것이다. 이사벨은 결국 자신의 초상화를 당대 베네치아 미술계의 거장으로서 비너스의 작가이기도 한 티치아노에게 다시 그리도록 했다 한다.


이사벨라라는 여성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사벨라 데스테(Isabella d’Este, 1474–1539)는 이탈리아 북부의 페라라 공국을 지배한 에스테 가문의 장녀였는데 만토바 공국을 통치한 곤자가 가문의 프란체스코 2세와 결혼하고 시가인 만토바 공국의 궁정을 운영한 당대 최고의 예술 후원자였다. 그녀는 정치적 역량도 탁월하여 ‘라 프리마 돈나’(La Prima Donna), ‘세계의 영부인’이라 불리는 여장부이기도 했다.


에스테 가문과 곤자가 가문은 이탈리아 북부를 대표하는 명문 귀족 가문으로, 때로는 정치적 라이벌로서, 때로는 혼인과 문화 교류를 통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며 각자의 도시 국가를 번영시켰다. 그런 과정에서 두 가문 모두는 강력한 예술의 후원자로서 르네상스 예술의 황금기를 가능하게 했다.


그녀는 라틴어, 그리스어, 철학, 음악, 역사, 춤, 점성술 등 폭넓은 교육을 받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티치아노, 라파엘로, 만테냐, 줄리오 로마노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이들을 후원했다.


류트 연주자이기도 한 그녀는 음악에도 깊은 애정을 가져 당대의 유수한 작곡자들을 후원하여 궁정음악을 종합예술로 발전시켰다.


이사벨라 덕분에 만토바 궁정은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녀의 예술적 품격과 정치적 영향력은 유럽에서 만토바 공국의 존재를 인정받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작은 도시 국가(공국)들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이들 공국은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문화적으로도 풍요로울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잉글랜드, 교황청과 같은 열강의 세력 다툼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Charles VIII)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에 주변 열강들과 공국들도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쟁은 65년이나 계속되었으며 이를 세계사는 ‘이탈리아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쟁의 결과는 스페인이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 전쟁을 시작한 프랑스는 오히려 밀라노와 나폴리에서 철수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사벨라의 남편 프란체스코 2세는 이 전쟁에서 프랑스에 포로로 잡혀 수년 동안 만토바로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정치적 공백 기간에 이사벨라는 남편을 대신하여 만토바 공국을 직접 통치했다.


그녀는 열강들 사이에서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만토바 공국의 지위를 안정시키고, 공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설득하여 아들 페데리코를 후작에서 공작으로 승격시켜 아버지의 통치를 이어가게 하는 등 곤자가 가문의 정치력을 공고히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녀의 외교 활동은 주로 편지라는 수단이 활용되었다. 그녀는 주변 열강의 주요 인물들과 편지를 통해, 만토바 공국의 외교적 입장을 조율하고, 동맹을 강화하여 전쟁을 피하거나 주요 인물과의 갈등을 무난히 해결해 갔다. 그녀가 외교적 목적으로 쓴 2천여 통의 편지는 후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Lettera manoscritta del 18 luglio 1524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 앞 편지


당시 프랑스가 밀라노를 점령하고 만토바를 위협하던 상황에서, 이사벨라는 직접 프랑스 왕 루이 12세에게 편지를 보내 만토바를 공격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 편지는 단순한 간청이 아니라, 만토바의 중립성과 문화적 위상을 강조하며 외교적 설득을 시도한 공식 외교 서한으로서 루이 12세를 설득하기에 충분한 진정성을 보여주었다.


체사레 보르자와의 협상 편지


이사벨라는 당대 최고의 풍운아이자 권력가인 체사레 보르자와도 편지 외교를 통해 만토바 공국의 안정과 문화적 지속성을 유지해 갔다.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1475–1507)는 이탈리아의 또 다른 유력 가문인 보르자 가문 출신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로 태어나, 탁월한 정치력과 처세술로 종교인, 군인, 정치가 등 다양한 이력을 섭렵한 권세가로 활약했다.



그는 아버지의 후원으로 15세에 주교가 되고, 18세에는 추기경이 되었으며, 이후에는 종교적 지위를 모두 내려놓고 프랑스 왕 루이 12세로부터 프랑스 남부의 발렌티노 공작으로 임명되고 교황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북부 로마냐 지방을 정복하여 자신의 공국을 건설하였다.


체사레의 공국은 만토바 공국에도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는데 이사벨라는 체사레와의 편지 외교를 통해 만토바의 중립과 안전을 보장받았다.


체사레는 1503년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잃고 스페인 북부의 나바라 왕국으로 망명하여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왕국에 대한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체사레를 현실 정치의 냉혹한 군주의 모델로 삼았다. 그는 체사르가 다소 잔혹하지만 효율적인 통치자였으며, 배신과 전략의 대가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사벨라 데스테의 편지 외교는 르네상스 시대 여성 외교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녀가 남긴 수천 통의 편지는 정치 외교적 전략 문서로서뿐만 아니라 문화 외교의 선구적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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